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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성 박사의 특별기고 <4>

기사승인 [622호] 2024.09.11  15:3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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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한국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대표회장

노벨문학상은 시, 소설, 평론, 학설이론 등 문학작품을 통해 인간의 정신 및 사회 발전에 문학적으로 공헌한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여 거금의 상금과 함께 메달을 수여하는 가장 영예스러운 권위를 가진 상으로 정평 나 있다. 지금까지의 수상자들을 보면, 그들은 문학을 통해서 정말 인류의 행복을 제공하려 피나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1972년 어느날, 노벨문학상 위원회가 스웨덴에서 열렸다. 그해 노벨문학상을 수여할 작가와 작품 선정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위원들은 그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와 작품을 선정하였는데, 독일의 하인리히 뵐과 그의 작품인 “아담, 너 어디 있었는가?”였다. 이 소설은 1952년에 쓰인 것이었지만, 1972년도에 수상작으로 선정된 것이다.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인간의 실상을 그린 소설로, 전쟁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를 고발하는 차원의 의미가 있는 내용으로 서술되어 있다. 성경 창세기 3장 17절부터 18절의 “아담아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신 질문을 제목화하여 작성되었다. 인간이 직면해 있는 현실에서 가장 정곡을 찌르는 교훈이기에 당당히 선정되게 된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살았다. 그들은 한가지 책임 조건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정언적 명령(Categorical Imperative)으로서 인간에게 내려진 숙명의 명령이었는데,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을 떠나 어느 곳에 숨어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아담, 너 어디에 있는가?”라는 다양한 의미의 질문을 받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를 몰라 찾으시느라 질문한 것이 아니다. 아담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있기에 그 상황과 처지를 물으신 것이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있는지 몰라서 물어본 것이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지극히 작은 존재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다.

여기서 아담은 말할 것도 없이 인간, 우리 자신을 말한다. 나아가 더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의 궁극적인 물음은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구원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 사랑의 근본적인 형상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성육화하여 이 땅에 보내실 계시적 사건을 불러오는 전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너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을 하실 때 영혼이 어디 있느냐가 핵심이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육은 악을 대변할 수 있는 실체로 보았다.

즉, 영원하기에 선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 선을 신으로 규정했다. 플라톤의 사상에 대입해 보면, 어디 있는가를 말할 때, 육체가 존재하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닌 영이 어디 있느냐를 말하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은 “영혼이 어디 있느냐”에 포인트를 두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는 드리면서도, 얼굴은 설교자를 향해 있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몸은 교회 안에 있지만, 영은 딴 곳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신학을 하면서 마음은 콩밭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헤겔은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하다 마음을 철학에 두다 보니 극단적 철학자가 되고 말았다. 진화론을 주장한 다윈도, 신학생이었으나, 영혼을 딴 곳에 두다 보니 생물학자로서 전대미문의 진화론자가 되고 말았다. 우리 주변에서 목사요 교수도 육은 신학교에 있으면서도 영은 유신진화론에 집착한 이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물으신다: “아담아, 너 어디있느냐? 어서 빨리 돌아와라.”, “유신진화론자들아, 너 어디있느냐? 어서 창조론으로 돌아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이러한 질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나는 이들이 “창조한 거룩한 땅, 에덴에 있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목사와 신학자가 되길 소망한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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