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 (25)
기사승인 [511호] 2022.01.19 18:30:38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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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라져버린 나의 옛집. 친정집 뜨락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해마다 엄마에게 엄청난 양의 열매를 안겨주었던 다산형의 나무였다. 은행나무를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라고 하지만 본가의 나무는 암나무라선지 가지만 주욱죽 벌어져 있는, 시골집 텃밭에 어울리는 평범한 나무였다. 언젠가 마루에 앉아 엄마가 문득 그러셨다. “아야, 저 나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믄 살째기 무서운 생각이 들어야, 비 오고 바람 겁나게 부는 날은 저것이 머리 산발하고 달라들 것 같기도 하고, 으짜다가 집 쪽으로 무너지믄 집도 나도 무너질 것 맹키로
과거 보릿고개 시절 그 때 그 시절의 어려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가난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옛 어른들께 들어보면 지금 살아가는 우리 세대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동떨어진 이야기이다.요즘 동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거 보릿고개 시절을 경험한 어른들의 삶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편리함을 누린다. 작은 스마트폰 속에서 시간을 절약하면서 배달 음식을 집 앞까지 주문해서 먹는 시대를 생각했을 때, 과거 어른들은 이런 시대를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저녁에 필요한 식료품이나 가정에 필요한 물건을 인터
창조의 원리에서 본 영혼 구원: 작은 구원, 큰 구원기독교는 한마디로 ‘구원의 종교’이다. 대표적인 성경 말씀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이다. 구원을 세분(細分)하면 큰 구원이 있고, 작은 구원이 있다. 작은 구원이 병으로부터의 구원, 마귀로부터의 구원, 환란으로부터의 구원이라면, 큰 구원은 말할 것도 없이 ‘영혼 구원’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이다.히브리서 2장 2절부터 3절에는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한
만약에 여호와 하나님께 대하여 직유법인 ‘여호와 하나님은 ~와 같다’는 표현법을 쓴다면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성에 대하여 확신의 결여로 연결되는 표현법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성을 표현하면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상대화할 수 없었다.이 신앙의 표현으로써 은유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본다. 즉,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움직일 수 없는, 변개될 수 없는 신앙의 고백적 차원에서 온 확신이기 때문에 직유법이 아닌 은유법을 사용한 것이다.시적 화자나 대적에 대하여 주로 직유를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인간들의 상황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생존을 결정하는 건 전두엽(지능) 색깔이 아닌 수저(계급) 색깔”이라는 청년의 유서 한 줄이 가슴을 찔렀다, 종종 ‘금수저’들의 횡포가 우리 가슴을 아프게 한다. 놋수저, 흙수저들이 박탈감에 빠져들고 금수저들이 반사회성을 띤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는가. ‘흙수저 자성론’을 불 지핀 어느 대학생 글에 콧등이 시큰했다. “나는 흙수저란 말이 싫다. 부모님이 그 단어를 알게 될까봐 죄송하다. 나는 부모님에게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좋은 흙을 받았다. 그래서 늘 감사하다.”어느 심리학자가 공사현장에서 흥미로운 한
창조의 원리에서 본 영혼 구원: 구원의 종류성경에서‘구원’(헬, 소조, save)이란 단어는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단어이다. 기독교는 한 마디로 ‘구원’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말씀으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와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7).또한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풀이 무성한 푸서릿길을 걷거나 나지막한 산에 경사진 자드락길을 걷을 때면,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나뭇잎 그득히 덮인 산길을 걸을 때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취로 다가온다.그 옛날 어느 사람이 아무도 걷지 않았던 곳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그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 그렇게 사람의 발로 만들어진 다져진 길은 차츰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을 것이다. 사람이 길을 만들었지만, 어느 때부턴지 길이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걸으며 바라보는 길은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역사의 길이기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다 네 덕이야.” 말한다면 얻어 가진 좋은 결과보다 월씬 더 좋습니다. 재밌는 의사를 만났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맨 마지막에 만나는 의사가 최고지요. 뭐.” 이리저리 치병을 위해 다니면서 차츰 호전된 환자가 맨 마지막에 만난 의사의 처방으로 쾌차했을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딴은 그렇기도 하여 한방, 양방, 민간요법까지 두루 거치다 마지막에 그 의사를 만나서 효험을 본 셈입니다. 그러니 그 의사를 같은 질병을 앓는 다른 사람에게 구태여 소개할 건 없습니다. 다 같은 효험을 보는 건 아니기 때문이지요
제 신조 중 하나는 쓸 것, 먹을 것, 누릴 것 아껴서 선교헌금 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혼자 있을 때 카페라떼 한번 사먹은 적이 없습니다. 차를 타고 장거리를 이동하다가 휴게소에서 카페를 보면 때때로 카페라떼 한 잔 마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가 있지만 카페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발길을 돌리곤 했습니다.그런 제가 선교헌금을 드릴 때는 최선을 다해 드립니다. 제가 섬기는 예수비전성결교회는 매주 금요일마다 선교헌금을 드립니다. 또 한 달에 한 번 선교 예배를 드리면서 선교헌금을 드립니다. 그때 제가 드리는 헌금의 최소 단위
사람들의 가치관이 다양해지고, 서로의 취향을 존중하는 사회로 진입하면서 각자의 개성이 너무 뚜렷해지고 있다. 전통적인 사회 가치관은 개인의 취향도 중시되었지만 공적인 가치관이 무엇보다 중요했었다. 과거 어른들에게 공동체 의식과 공동체에서 비롯된 가치관은 대단히 중요했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의 분위기는 너무 소중했다.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다. 요즘 들어 공동체 또는 ‘함께 한다’는 가치관이 많이 시들어지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생각을 공유하고 나누는 시대는 지나고, 각자의 개성과 취향이 존중되는 사회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