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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 (47)

기사승인 [625호] 2024.10.17  05: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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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격

이재정 목사(복된교회)

가까이 사시는 목사님 한 분은 대단한 독서가입니다. 책 중에서도 이해 어려운 책들, 벽돌처럼 두꺼운 책들을 주로 읽으신대요. 매주, 읽으신 책을 잘 요약해서 동료 목사님들께 설명도 해 주신답니다. 사고의 깊이가 넓고 깊을 것은 자명하지요.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도 범상치 않은 내공을 느꼈습니다. 그분이 속한 교단의 고리타분한 교리로 무장 된 꽁생원 이미지를 훨씬 벗어난 모습이 훌륭해 보였습니다. 목회 내려놓으실 날을 정했는데 함께 책 읽는 목사님들이 그 모임만큼은 지속해 주시기를 요청한답니다. 그분의 중요한 논조는 ‘교회가 약화 되는 건 목사의 공부 부족이다. 목사가 바쁜 건 죄다. 오로지 책을 읽고 공부해야 한다.’랍니다.

그분이 다독가의 길로 들어선 연유도 귀 넘어 들었습니다. 신학대학을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여전한 강의, 변함없는 논조에 기가 질려, 강의실 대신 도서관을 찾게 되었더랍니다. 그 말에 깊은 공감입니다. 칼빈, 루터, 웨슬리 모두 훌륭한 신학자라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시대를 넘어선 신학 계열의 전문가들 논조가 100년간 변함없는 건 지금도 느끼는 답답함입니다. 정해진 주제에는 정해진 답만 있습니다. 그러니 공부라는 걸 집어 들어도 여전히 창발적 제안에 목마릅니다. 책들도 절반 이상, 어떤 경우는 70% 이상 기존의 지식이나 정보를 다시 정렬하는 수준에서 출발합니다.

13주짜리, 새로 열리는 강좌에 참여합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주제를 다루지만 중요한 주제만 내세웠을 뿐 접근 논리는 100년 전에 구성된 논조에 갇혀 있으니 여전히 답답합니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순전히 박정희 대통령 덕분입니다. ‘문경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만주 군관학교로 갔다더군요. 군사혁명을 통해 결국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가 마지막으로 교편을 잡았던 그 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주었습니다. 나는 마침 그 학교 학생이었습니다. 운 좋게 ‘독서 어린이’에 선발되었고, 난생처음 본 형광등 불빛 아래, 선생님의 지도로 어린이 문학 독본부터 독파해 나갔습니다. 내가 읽은 책을 정해진 규격대로 요약하고, 글로 적고, 선생님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은 겁도 났지만 그들의 박수와 격려로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니었지요. 열두 살에 그 학교를 떠날 때 마지막으로 읽은 책이 ‘태평양 전쟁사’였습니다. 국민학생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횡서로, 한자가 더러 섞인 책입니다. 장장 열여섯 권이나 되는 걸 읽어 재꼈습니다. ‘가미가제독고다이’나 ‘히메유리부대’를 비롯해서 ‘아카키전함’ 같은 일본해군 항공모함 이름도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세계 아동문학 전집이나 서양 고전들을 읽는 건 산골 소년에게는 충격이었지요. 나는 읽어 댄 여러 책 속에서 생각이 부쩍 자랐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극성스러운 책읽기를 중단하고 충청도로 전학했을 때, 처음 만난 담임선생님의 신기한 듯, 의미 있는 질문들의 이유는 내 속에 애늙은이가 들었던 걸 감지하신 탓일 겁니다. 거기서부터, 중, 고등학교를 거치는 공교육과정 내내, 심지어 대학 공부까지 나를 더 자라게 할 ‘썸씽 뉴’(Something New, 새로운 것)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때부터 일찍 노화를 겪어 온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해 아래 특별한 새것이 있기야 하겠습니까 만.

세상의 변화는 번개 같습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세상은 돈을 지향하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합니다. 반면 돈 보다 높은 가치를 지향하는 교회는 여전히 100년 전에 머물러 있다는 현실 파악은 공감대가 넓어졌습니다. 마감 날짜 잊고 있던 원고를 급히 써 보냈습니다. 청탁한 측에서 중요한 회신이 왔습니다. ‘동정녀 마리아는 혼전 임신을 불륜의 오명을 각오하고 받아들였다.’라는 논조에 수정을 요청해 왔습니다. 그 원고는 남녀노소 모두를 독자로 하는데, 지금의 젊은이들은 혼전 임신을 윤리적 불륜으로 인식하는 데 거부감이 있다는 요지였습니다. 내심 갈등을 겪었지만 새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결의를 앞세웠습니다. 비겁함을 각오하고, ‘난자와 정자의 결합 없는 상태의 임신은 과학적 이해를 넘어서는 현상’ 정도로 에둘렀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가진 성경적 가치관을 가벼이 여기는 거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틀을 깨지 않은 자리에서 새 세상을 받아들인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고정형 틀을 깨지 않으면 새 세상이 흘러들어올 수 없습니다. 내년 목회를 암중모색하면서 그런 파격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앞세웁니다. 뭐가 파격적으로 새로운 것일지요.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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