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마 길보른과 전후 한국교회의 재건”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
III. 엘마 길보른과 구호사업 그리고 사회복지
1. 반공과 전도
동양선교회가 한국교회와 사회에 기여한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세계복음주의와 아시아를 연결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십대선교회(Youth for Christ)는 중국의 주요 도시에서 전도집회를 열기를 원했고, 이것을 위해서 1948년 밥 피얼스(Bob Pierce)와 도슨 트로트맨(Dawson Trotman)이 베이징에 왔다. 그리고 이들은 동양선교회 신학교 캠퍼스에 머물게 되었는데, 피얼스는 엘마 길보른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세계복음주의 기독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취하였다. 트로트맨은 네비게이토를 만들었고, 피얼스는 월드 비전을 만들었다. 1949년 초 길보른 형제는 공산주의의 위협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정부를 수립했고, 정정당당한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불안했다.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공산주의의 위협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1949년 9월 길보른 형제는 중국에서 만났던 밥 피얼스를 초청해서 김치선 목사의 통역으로 전도집회를 열었다. 밥 피얼스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좋아했고, 한국에 올 때 마다 그는 엘마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뒤 팝 피얼스는 1950년 봄 동양선교회의 유진 어니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다. 이 집회는 3월 27일에서 4월 26일에 걸쳐서 한경직 목사의 통역으로 진행되었고,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전국의 주요 도시를 다니면서 순회하였고, 약 백만명이 참여하고, 25,000명이 헌신하였다. 그뒤 밥 피얼스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함께 사역하였다. 자연히 젊은 나이의 엘마 길보른도 한국교회의 중요한 인물들과 교제를 나눌 수 있었다.
당시 한국은 공산주의의 집요한 공격 아래 있었다. 아직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지만 남로당은 남한 지역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한경직 목사는 1950년 빌리 그래함을 초청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 전도집회는 동시에 반공집회였다. 이미 공산 치하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탄압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경직 목사는 공산주의와 강한 지역에 빌리 그래함과 함께 용감하게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고, 이런 지역에서 공산주의는 현저하게 사라지게 되었다. 엘마 길보른도 이들과 함께 복음을 전하도록 초대 받았다. 사실 엘마는 이 지역에서 전도하는 것이 매우 두려웠지만 전도집회가 성공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이 지역의 군인들이 민간인들에게 집회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한국사회는 기독교가 공산주의를 막는 중요한 방패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복음전파와 반공사상 그리고 대한민국의 안보는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엘마 길보른은 당시 공산주의가 단지 시골만이 아니라 서울에도 강하게 퍼져 있었고,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깊숙이 침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엘마 길보른의 한국통역은 서울신학교 교수의 아들 “박”이었다, 그는 매우 유능한 통역이었다. 좋은 통역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통역을 만난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엘마가 부활절 새벽 예배에 설교를 하였고, 그가 통역을 하였다. 하지만 그 통역의 얼굴에는 고뇌가 많았다. 그 후 엘마는 그에게 당신이 혹시 공산주의자가 아니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엘마는 자신은 공산주의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말했고, 통역은 사임했다.
약 두세 달이 지난 다음에 엘마 길보른은 시골에서 머물고 있는데, 새벽 3시에 서울에서 사람이 와서 통역이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고 있으니 빨리 서울에 가서 구해달라는 전갈이 왔다. 통역은 서대문형무소에 갖혀 있었고, 부소장은 아현교회 신자였다. 엘마는 부소장에게 통역의 아버지가 바로 신학교 교수이며, 이 사람은 자신의 통역이었다고 말하면서 석방을 요구했다. 하지만 부소장은 이 사람은 남노당의 부위원장이며, 남한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 때문에 체포되었다고 말했다. 아울러서 만일 당신이 이 사람을 두둔한다면 당신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엘마는 더 고위층에 말했지만 역시 그의 대답도 같았다. 그러나 엘마는 매주 몇 차례씩 이 사람을 방문했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산군은 그를 즉시 석방시켰고, 엘마는 그후 이 사람에 대해서 듣지 못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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