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의 쑥떡
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그림들’ 저자) |
철을 모르는 세월이 되었다. 여름 과일인 수박 참외는 지금도 마트에 쌓여있고 초여름 과일 딸기는 이제 한겨울 과일이 되었다. 명절이나 특별한 날에 먹던 떡들은 이젠 일상의 음식이다. ‘맛있다’는 음식에 사용되던 단어는 맛보다는 이제 ‘특별하거나’ ‘귀한’ 곳으로 슬쩍 자리를 옮겨 앉았다. 혹시 존재의 근간에 있던 먹고 사는 일이 그 한계를 벗어나면서 철없는(?) 시절이 되었고 철이 없어지니 우리에게는 *가리사니가 없어진 것일까, 아침 산책길에 마치 첫눈처럼 눈이 조금 흩날렸다. 퍼얼펄 눈이 옵니다/하늘에서 눈이 옵니다/하늘나라 선녀님들이/하얀 가루 떡가루를/자꾸 자꾸 뿌려 줍니다 흥얼거리다 보니 눈조차 떡가루로 생각하던 시절이 생각나며 엄마의 쑥떡이 생각났다.
쑥을 넣은 인절미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특히나 이른 봄 햇쑥을 캐서 인절미를 하면 아주 어여쁜 연둣빛 떡이 된다. 쑥을 많이 넣고 적게 넣고의 차이에 따라 빛깔이 조금 달라지긴 하지만 갓 캔 쑥을 넣은 인절미의 연둣빛은 우아하기조차 하지. 거피한 하얀 팥고물에 연둣빛 쑥떡을 살짝살짝 묻히면 그 맛은 거의 환상적이다. 그러나 정말 깊은 맛이 있는 쑥떡은 겨울 쑥떡이다. 엄마의 쑥떡. 엄마는 봄이 되면 쑥을 캐서 모으시곤 한다. 캔 쑥을 살짝 데쳐 몇 날 며칠 말리신다. 쑥은 말리면 맑은 회색빛이 된다. 잘 말라서 바스락거리면 쑥을 갈무리해서 봉다리에 담고 쑥은 여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보낸다. 설이 다가오면 쑥 담긴 봉투를 열고 조물조물 만진 후 얼개미에 치신다. 그러면 쑥에 남아 있던 거친 줄기가 걸러진다. 그 쑥을 다시 살짝 물에 삶아서 티 하나 없이 잘 건사한 다음 체에 건져 씻어놓은 찹쌀과 콩을 가지고 방앗간에 가신다. 흰 찹쌀과 소금 조금, 일 년을 묵은 쑥들이 방앗간에서 익혀지고 다시 이리저리 뒤집히며 합해져 거무튀튀한 오묘한 색의 쑥떡이 만들어진다. 우선 내가 하는 일은 쑥 덩어리 하나를 꺼내 손가락으로 집어 스윽 자르는 일, 쑥떡은 금방 쉽게 잘리지 않는다. 차진 결대로 주욱 늘어났다가 오므라들고 싶은 만큼 오므라드는, 바야흐로 들쑥날쑥이다. (아 그렇다면 혹시 들쑥날쑥도 쑥떡에서?) 내고향 보성에서는 <묵다 남은 쑥떡> 이란 말도 있다. “묵다 남은 쑥떡처럼 생겨서” “생긴 것은 묵다 남은 쑥떡 같아,....” 묵다는 먹다의 잔라도 말이고 그 뉘앙스는 예쁘고 사랑스럽다기보다는 균형 없는, 거칠고 산만한 혹은 볼품없는 생김새를 일컫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쑥떡은 말랑거리고 부드럽고.....그 깊은 쑥의 향기를 뭐라 표현해야 할까, 햇쑥처럼 향긋하진 않으나 깊어서 격이 있는 향기다. 세월의 향기라고나 할까, 쑥떡은 특별하거나 귀하지 않지만 세상의 달고 보기 좋은 어느 떡하고 견준다 한들 비교불가한 그만의 개미가 있다. 생각해보면 쑥떡만 한 사람도 흔치 않다.
설이 다가올 무렵이면 엄마의 쑥떡이 왕림하시곤 했는데 이제는 아니다. 동네를 누비며 쑥을 캐고 쌀을 일어서 방앗간으로 가져가시던 엄마는 이제 작은 방이 우주가 되셨다. 그래도 화장실 내 힘으로 가는 것이 어디냐, 하시며 의연하게 살아가신다. 사 남매 잘 키워 내셨고 집안의 큰며느리 노릇도 잘하시고 무엇보다 교회 일도 참 많이 하셨는데 이제 작은 촛불이 되어 가느다란 빛으로 살아가신다. 나는 엄마를 보며 나를 본다. 나도 금방 엄마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내 딸이 나를 바라보며 아 울엄마.... 내 인생의 모든 이야기를 엄마에게 다했는데. 그럴 때마다 세월의 답을 주곤 했는데 언제 저렇게 약해지신 거지....내 딸아이가 나를 보며 가슴 저릴 시간도 머지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일 년이 눈 깜박할 새 지나가더니 새해가 왔다. 그리고 이 새해 역시 그렇게 순간처럼 지나갈 것이다. 엄마는 하늘나라로 더 가까이 다가서고 나 역시 그렇다. ‘사물을 이해한 뒤의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고상하다’고 위화가 썼다. 생각해보면 삶은 참으로 쓸쓸해, 그래도 고상할 수는 있지 않을까!
* 가리사니: 순 우리말로 지각, 판단할 수 있는 실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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