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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32)

기사승인 [610호] 2024.04.01  16:3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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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상인생(途上人生)

이재정 목사(복된교회)

사람 발걸음 닿지 않는 깊은 산에도 길이 있는 거 아셔요? 노루, 멧돼지, 산토끼, 같은 네발짐승들이 다니는 길입니다. 내 유년 시절 기억에 남아 있는 그 길은 피로 얼룩졌습니다. 지금은 불법이니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그때, 눈 쌓인 겨울에 그들이 남긴 발자국이 아니더라도 눈썰미 좋은 사냥꾼은 쉬 그 흔적을 파악하고 올무를 놓아 짐승들을 잡곤 했지요. 산토끼나 노루 같은 짐승들이 꼭 다니는 길로만 다니거든요. 그 길에서 동료들이 올무에 걸려 발버둥 치다 선혈 낭자하게 죽어간 흔적을 보고도 여전히 그 길로 다니다 수없이 걸려 죽어갑니다. 어린 나는 눈썰미 좋은 사냥꾼들의 노획을 최선을 다해 증오했지만 그게 짐승의 길인 걸 어쩌겠어요.

사람은 짐승과 달리 돌아보는 눈이 있으니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봅니다. 청년 때는 마라톤을 제법 잘했습니다. 신학대학 체육대회, 10 Km 달리기에 입상한 기록이 있을 만큼요. 장거리 경주의 막바지에 숨이 턱에 찹니다. 교통이 통제된 대로 한복판에 주저앉아 포기할까 싶은 순간에 다른 주자들을 힐끗 봅니다. 그들도 기진맥진입니다. 옳다구나, 한 호흡만 더 몰아쉬면 고비를 넘을 수 있겠다 싶습니다. 발악하듯 땅을 박차 한두 발짝만 앞서면 수월해집니다. 막바지에서 조금 더 힘쓰는 거, 중요한 공부였습니다.

군대 훈련소에서는 밤중에 지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길을 배웠습니다. 밤중에 별이나 나무를 보고 동서남북을 구별하는 법 같은 것두요. 삶에 도움을 받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실제 부대에 배치받았을 때는 더러 지뢰밭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지요. 6·25 때 묻은 지뢰밭이니 위험부담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정말 조심스럽게 행보했습니다. 인생길의 방향이나 행보에 늘 기울여도 모자라는 조심성을 배웠습니다. 여전히 엄벙덤벙 살기는 하지만요.

처음 익산에 와 살면서는 주변의 여러 산을 다녔습니다. 등산로가 아닙니다. 산삼 전문가인 친구의 관찰로는 금산 가까운 대둔산 언저리, 소양 부근에는 산삼이 있을 거래요. 금산 인삼밭에서 인삼 씨 먹은 새가 와서 그 씨를 배설했을 거라나요? 산에서 사람이 심지 않은 삼을 발견한다는 상상만으로 얼마나 드라마틱한지요. 정말 산삼을 볼 욕심으로 사람 발걸음이 뜸해 길도 없는 악산(岳山)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얻은 건 실낱같은 삼 한 뿌리만 말고도 제법 있었고말고요. 더덕, 두릅, 취나물 같은 걸 한 걸망 짊어지고 내려옵니다. 일주일 내내 먹어도 남을 만큼요. 물론 지게 작대기보다 큰 구렁이나, 날렵하기 이를 데 없는 유혈목이를 만나 기겁한 경험도 있습니다. 덤으로 그 지난한 등산에 따라나섰다가 찢기고 긁힌 아내의 타박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산에 가려면 당신 혼자 가. 나는 안 갈 거예요!” 고난의 길을 걸어야 보물을 얻는다는 걸 나만의 실천으로 간직해야지요. 뭐.

그래도 걷는 건 멈추지 않습니다. 월요일을 틈내서 좀 멀리 지리산 등산로 중에서 제일 만만한 노고단 길로 많이 다녔습니다. 산 아래서는 진달래가 다 피었다 지는 5월 되도록 산꼭대기 응달 계곡에는 얼음이 숨어 누워있습니다. “겨울 시체”라고 이름 지어 주었습니다. 뱀사골 계곡을 더 터 천년송에 이르는 길도 걷습니다. 계곡을 끼고 오르는 초입은 수월하고 서정적입니다. 막바지 다급한 오르막은 숨이 턱에까지 차지만 천년송, 그 웅장한 소나무 아래서 내려다보는 ‘와운마을’ 풍경이 절묘합니다. 특히 단풍철이 좋습니다. 가까이는 부안의 내소사 길도 걷는 데는 그만입니다. 그도 아니면 함라산 길도 시간의 가성비가 좋지요. 만경강 제방길이야 말해 뭘 하겠습니까. 배산 둘레길은 사람이 너무 많아 피하는 길이구요.

지금은 들판을 걷습니다. 겨울에는 깜깜한 밤이지만 춘분 지난 이즈음은 걷기 좋을 만큼 뿌옇게 밝아옵니다. 동트기 전 사람 없는 들판 길을 걷는 건 운동 겸 사색의 기회입니다. 역설적으로 검은 의복이 화려하듯 홀로 누리는 호사스러운 시간입니다. 오늘 새벽은 주님이 길 되신다는 말씀을 깊이 묵상합니다. 그 웅숭깊은 묵상으로 ‘선혈 낭자한 짐승의 길’에 닿은 거지요. 선혈 낭자한 올무가 놓인 죽음의 길, 죽음 흔적을 보고도 피해 가지 못하는 짐승의 길을 돌이키지 못하면 여전히 짐승으로 살다 죽는 거 아니겠어요?. 짐승의 길이 아니라 선혈 낭자한 십자가의 길, 그분의 죽으심으로 이루는 생명의 길로 듭니다. 나는 지금 그 길 위에 있습니다. 평생 그 길로 걸어 그분께 닿을 겁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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