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박용궁 목사의 이야기 교회사 <12>

기사승인 [612호] 2024.04.25  04:32:32

공유
default_news_ad2

- 첫 번째 동부 수도사들

박용궁 목사(D.Min.., 많은샘교회 담임, 미국 루터신대(LTSP) 졸업)

초대교회에서 교회는 체험의 은사를 받은 기독교인들로만 형성된 집단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서 교회는 구원을 위한 대행기관이며 구원을 보장하는 곳으로 여깁니다. 박해가 끝나고 교회에 평화가 찾아오면서 그만큼 종교적 열성과 긴장도가 약화되는 것도 필연적입니다. 보다 열심히 믿는 자도 있고 아닌 자도 있게 됩니다. 교회는 모두를 인정하지만 그래도 보다 영적인 것을 갈망하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이원론적 사고가 신앙에서 모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신앙으로 용납되는 부분도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라는 말씀처럼 좀 더 영적이고자 하는 이들은 육의 고난을 감수하는 방법을 찾게 됩니다. 금욕주의입니다. 영성의 시작은 육적인 것을 떠나는 것이며 육과 마음으로부터 자기를 부정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사는 세상과는 보다 멀리 떨어진 곳이 하나님을 만나기 쉬운 곳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원을 가는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사막에서 사는 이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사막만이 아니라 모래기둥에 올라가기도 하고 동굴이나 산에 올라 기도합니다. 사람과 동떨어진 곳이나 하늘에 보다 가까운 높은 곳을 찾습니다. 이런 이들을 신기하게 여기고 존경하는 이들이 생깁니다. 나아가 찾아와서 은둔자에게 먹거리를 제공하기도 하고 가르침을 청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근처에 자리 잡고 같은 길을 걷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시작은 사실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지속할 수 있는 것은 디테일(detail)이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야 사막에서 구도의 길을 갈 수 있는지 노하우를 먼저 시작한 이에게 배우고 따라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서로가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합니다. 그렇게 하여 교회처럼, 또 바울과 디모데처럼, 그렇게 은둔자들도 단체로 발전하며 규율을 정하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 인물로 아타나시우스의 저서에 나오는 안토니(Antony, 251~356)가 있습니다. “사막에 핀 꽃”이라 불린 안토니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며 은둔자들의 아버지로 칭송됩니다. 그는 모든 재물을 포기하고 270년경부터 금욕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는 동굴에 살면서 엄격한 자기 부정의 수련을 쌓습니다. 안토니의 예를 많은 이들이 따랐고 아우구스티누스도 그의 「고백록」(Ⅷ, 6)에서 이것에 대해 말합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나일강 상류에서 군인이었던 파코미우스(Pachomius)는 남성수도원을 설립합니다. 파코미우스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 따라 섬김과 수도 생활을 가르칩니다. 수도자가 늘어나고 공동체 운영을 위한 경제적인 문제가 커집니다. 그래서 자급자족을 넘어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분배하는 제도를 도입합니다. 파코미우스의 사후 그의 수도원이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형태가 동부 지역에 급속히 퍼집니다.

어떤 이들은 나무 위에서 지내기도 하고 심지어 낙원인 에덴동산의 이상을 따른다며 옷을 벗고 수련하는 이도 나타납니다. 이러한 다양성은 당시 기독교의 보편적 모습의 하나입니다. 이들은 세상 어디에나 악령이 있고 이들과 투쟁이 구도적 자세의 삶이라 주장합니다. 수도원 제도가 타락 이전의 상태로 돌리는 방법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묵상하는 생활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일반인들에게도 영적 가르침과 섬김으로 다가섭니다. 묵상의 강조는 열성을 부르지만 반면에 교리를 가볍게 여기게 합니다. 물론 수도원의 개인의 수행보다 사회적 수행을 강조하는 이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다양하게 하나님을 찾고자 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좀 생뚱맞습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구절이 있더군요.

“사막. 그것은 어느 날, 내게 마음으로 접촉할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사막으로 나간 이들은 하나님을 좀 더 가까이 만날 기회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