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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서종표 목사-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37)

기사승인 [599호] 2023.11.08  20: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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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자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님

김용은 목사

 

■ 이정만 장로(전주태평교회 원로)

1996년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이관순 집사도)도 1971년 4월 19일에 돌아가시어 두 분의 묘지가 흩어져 있었는데, 김용은 목사님의 권유로 부모님의 묘지를 교회 묘지로 이장하게 되었다.

나는 어려서 어머님의 손잡고 교회에 가는 것이 즐거웠다. 특별히 부흥회 할 때면 맨 앞에서

어머님과 같이 박수하고 소리를 지르며 예배를 드렸다. 김용은 목사님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우리 가정사에 관심과 사랑을 주셨었다. 나의 아버님은 한국합판 사장이요 국회의원이었던 고판남 씨와 같이 사업을 하는 등 부유한 건축업자였다. 그러나 사업의 실패로 가난하게 되었고 일찍 돌아가시면서, 어려서부터 김용은 목사님은 나에게 아버님이셨다.

이후에 삼성애육원의 어린이 합창단을 맡아서, 전북 시설합창단의 대회에 참가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정중흥 권사님은 말할 것도 없고 김용은 목사님은 가는 곳마다 내 자랑을 하시곤 했다. 나와 목사님 가족과는 각별하다. 내가 중고등학교 시절, 김 목사님의 큰 딸이신 신자 누나는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었다. 특히 ‘여호와는 나의 목사시니’와 ‘수선화’를 잘 불렀다.

대학시절엔 영곤이 형님과 중창단 노래도 했었다. 그리고 지금은 헌곤이 동생과 자주 만나 형제처럼 지내고 있다. 김 목사님 생전에 부모 없는 우리 형제들을 돌봐 주셨는데,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며 지켜주시는 목사님이시다.

■ 최순길 목사(서울 수목원교회 원로): 그 모습이 주님의 사랑인 것을

내가 김용은 목사님을 처음 뵈었을 때는 6.25 사변 직후일 것이다. 교회에서 우유 가루, 옥수수 가루를 나누어 준다는 소리를 듣고 중동교회에 가보니 하얀 드럼통의 우유통을 열고 바가지로 우유를 나누어 주시는 모습을 보았다. 물론 미국에서 구호물자로 헌 옷들이 왔다고 하며 모여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모습도, 당시에는 이발을 못하고 긴 머리를 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 목사님은 이발 기계를 구입해 이발도 해주셨다.

고등학교 시절에 목사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일들이 참 많았다. 언젠가 주일 오후에 교회 마당에서 배구하며 즐기고 있는데 “순길아, 너 나와 갈 데가 있다, 따라와라!” 하시기에 따라갔더니 군산교도소였다. 태어나서 처음 가보게 된 교도소였고, 그래서 어리둥절해하는 나에게 김 목사님은 찬양을 부르라고 하셨다. 나는 찬양을 안 부르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얼떨결에 찬송을 부른 기억이 난다.

또 어느 날 장항에 가자고 하시기에 목사님을 따라나섰다. 곱살한 남성 복장을 한 사람이 있는데 “순길아! 저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 물으신다. 한눈에 봐도 여자이지만 나는 목사님께 “남자지요!”하였더니 웃으시면서 “여자야, 저분이 김옥선 씨란다. ” 그 후 그분은 3선 국회의원으로 유신독재와 군부독재에 맞서 저항했던 소신 있는 정치인이자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봉사해 온 사회사업가로 활약을 많이 하였다.

너무 지난 이야기이지만, 나는 김용은 목사님께 영향을 받아 늦은 목회를 시작하였고, 김 목사님을 본받아 전국 교도소를 돌며 예배를 인도하는 법무부 교정위원이 되었다.

목사님은 군산 주변의 섬들을 돌아보시며 교회를 세우시고 목회자를 세우는 일을 하셨는데 나 또한 그 영향을 받아 선교회를 세우고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등을 중심으로 교회를 4백여 개를 넘게 세웠다. 지금도 그 일은 선교사를 통하여 계속하고 있으며 해마다 필리핀, 중국, 대만에서 선교집회를 하고 있다.

나름 35년 동안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던 중, 김용은 목사님이 83세 되시던 해에 서울우리교회에 오셔서 대예배를 인도하실 때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은혜가 되며 눈물이 나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2층 학생회관(적산가옥)에서 학생들이 밤새워 입시 공부하도록 허락하신 일은 참으로 잊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그 시절의 학생회 친구들인 이점만, 김병호, 임동섭 등을 자주 만난다. 그리고 주일학교 교사로 함께 일했던 홍기춘, 현순종 목사, 노복례, 이인옥 전도사, 현상종, 김영재 장로 등은 그때의 김 목사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지금은 감사하게도 각자 처한 곳에서 신앙의 거목들이 되어 있다.

목회하다가 누군가가 “여러 목회자들 중에서 어떤 분을 목회의 모델로 삼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주저하지 않고 “김용은 목사님”이라 대답한다. 김용은 목사님은 내가 감히 따를 수 없이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김용은 목사님을 만나게 하신 우리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김 목사님을 통하여 얻게 된 많은 일들을 생각하며 주님의 종으로 살아오면서 해온 일들은 모두 김용은 목사님의 영향을 받아 한 일 뿐이라고 다시 한번 감사의 고백을 드린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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