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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기사승인 [578호] 2023.03.22  15: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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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월

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삼월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너무 빨라서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들릴 것 같기도 하다. 이상하게 봄 가운데 있으면서도 마냥 봄을 그리워하는 정처 없는 심정이다. 땅을 찾아서 들여다보는데, 청결하고(?) 살기 좋은(?) 도시일수록 땅은 이미 없다. 우리가 밟고 사는 땅은 사실 땅이 아니다. 콘크리트로 숨통을 완전히 막아버린 생명이 없는 땅이니까, 죽어버린 땅을 우리는 땅이려니 여기는 게다. 숨을 쉬고 있는 땅이라고는 자그마한 화단가나 나무 심어 있는 공원뿐, 마치 사랑하는 아이와 눈 맞춤 하듯 고개를 숙이고 바라보곤 한다. 잘 있니, 오늘은 누가 솟았니. 누가 더 자랐니, 저 양지바른 쪽에는 푸르게 봄맞이꽃이 피어나 있었다. 이 작은 아이는 냉인가, 아마도 별꽃 피어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나 작은 것들이 가장 먼저 단단한 땅에 길을 낸다는 생각을 하면 참으로 눈물겹다. 골리앗을 이겨낸 소년 장사 다윗처럼 저 여린 것들은 혹한의 겨울을 이겨내는 준비된 전사다. 두려움 없는 양심의 소리거나 담대한 진실의 토로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이런 인내와 슬픔과 고통 정도는 지녀야 존재 아니겠니. 묻는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햇살 아래 눈부신 여린 풀들은 그대와 나의 삶을 투명하게 비추어내는 잘 닦여진 맑은 창문일 수도 있겠다.


초등학교 일학년 즈음 이었을까, 따악 이즈음의 시간이었다. 남쪽인데도 내 고향 보성은 지대가 약간 높아 봄이 아주 짧은 곳이었다. 봄 오나, 기웃거리며 옷소매 깃 여미다 보면 여름이 와있었다. 더불어 근접한 바다 탓에 안개는 자주 출몰했고 그 안개 덕에 차 맛이 깊어지는 곳이었다. 엄마 뱃속에서 부터 다니던 예배당은 옛날의 예배당이 거의 그러하듯 약간 높은 산 위에 홀로 있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호젓한 산길을 걸어가노라면 진한 소나무 향기처럼 무서움도 짙게 풍기는 길이었다. 그래서 누군가와 꼭 함께 그 길을 가곤 했는데 그날은 혼자였다. 혼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무심코 걷다가 혼자구나, 라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의 공포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사위는 따뜻한 햇볕으로 밝고 환했지만 무섭도록 고요했다. 가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려온다. 발자국이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도 온몸이 긴장한다. 달리고 싶지만 쉬 달려지지도 않는다.

다리는 갈수록 뻣뻣해 온다. 약간 휘돌아진 산길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갑자기 흰옷을 입은 할머니들이 나타났다. 셋, 넷? 몸은 아주 자그마한,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붉은 흙구덩이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먹고 있었다. 그 순간의 공포는 지금도 너무 선명하다. 숨이 훅 들이켜진 뒤 내 쉬어지지 않았고 그 놀라움이 얼마나 컸던지 잘 걸어지지도 않던 다리가 마치 바퀴로 변하듯 저절로 달려졌다. 두 번 정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숨도 쉬지 못하면서 달리고 난 후에야 산길이 끝나고 교회가 보였다. 이제는 안다. 기억이 얼마나 변덕스럽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그러나 오래전의 그 서늘함은 내 어린 시절의 저장창고에 선명하게 남아 삼월을 그려주고 있다. 
어느 해 산수유가 가득 핀 마을엘 들렸다. 동네 어귀에서 잠깐 빗방울이 내렸다. 바람보다 더 작은 몸짓으로 산수유 꽃잎들이 빗방울에 의해 흔들렸다. 내게 멀미처럼 다가오던 흔들림. 산수유는 시춘화라고 부른다.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이다. 봄을 환영하는 영춘화도 있고 산속에서는 산수유 보다 먼저 생강나무가 피어나기도 하지만 산수유 속에 서있다 보면 눈빛이 노랗게 물들여져 모든 것들이 노란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삼월 속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신비로운 일이다. 


대니얼 네튼은 미래의 행복은 현재의 행복지수에 달려 있다고 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해본다면 행복을 느끼는 감도가 지금 없는데 미래에는 생길 것인가 묻는 이야기. 그의 책 서두에는 나다니엘 호오손의 글이 써있다. <행복은 나비와 같다 잡으려 하면 날아가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너의 어깨 위에 내려 앉는다>는, 그러니까 행복은 바라볼 수 있는 응시력을 지닌 사람에게 나타나는 꽃이라는 것. 
그대 삼월 가득하신가.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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