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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7)

기사승인 [569호] 2022.11.30  17:0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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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의 생애

                       김용은 목사

서장은 자신의 관내에서 신사참배 거부자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리는 것이 출세에 지장이 된다고 판단했다. 관내만 벗어나면 추궁하지 않겠다는 의사이기도 했다. 용은은 그렇게 풀려나게 되었다. 정읍 경찰서 유치장에서 풀려나자 공출 대상이라며 한 달 안에 쌀과 보리 일정량을 내놓으라는 통지문이 도착해 있었다.

논과 밭을 구입한지 한두 해밖에 되지 않아 소출이 없는데도 땅 면적 대비 공출을 명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총독부의 처사에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김 집사는 일제 앞잡이 면장에 대한 분노가 다시 끓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참고 있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통해 들려오는 일제의 수탈은 결코 조선인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며칠이 지나고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김 집사는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따졌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나를 모함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만 면민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서 같은 고향 사람들 고혈을 빠는가? 지금 만주에서는 나라를 되찾자고 수많은 애국지사가 죽어 가는데 당신은 어찌하여 일본 놈에게 빌붙어 호의호식하는가?” 

김용은은 몸을 날려 책상을 뒤엎고, 면장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힘껏 내동댕이쳤다. 김용은이 면사무소를 뒤엎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다. 사람들은 통쾌하다며 용은을 우러렀지만 그는 이제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용은은 집으로 갈 수 없어, 정읍 읍내 친척 집에 은밀하게 머물며 기도에 집중했다. 정읍제일교회 교인들과 산기도를 했다.

어느 날 새벽기도 시간이었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550장)을 불렀다. 그 아침. 그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던 그날. 정읍 전화국에 다니고 있던 친척 딸로부터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그 아침. 그 찬송을 부르고 또 부르던 그날. 정읍 전화국에 다니고 있던 친척 딸로부터 도무지 믿기지 않는 기쁜 소식을 전해 들었다. 우리나라가 해방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했다는 것이다. ‘오 주님, 꿈이 아니겠지요. 슬픔과 애통이 기쁨이 되다니요. 오 주님, 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 모든 영광 당신께서 받으시옵소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소식을 듣고, 용은은 기도 동지들과 함께 정읍 시장에 나가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만세, 대한독립 만세! 감격에 복받쳐 눈물로 외쳤다.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을 ‘조선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으로 개사하여 불렀다. {조선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어둡던 이 땅이 밝아오네. 오래전 애국자 꿈꾸던 복을 조선의 독립을 누리겠네.}

◆ 정읍 애육원 설립

성결교회는 1945년 11월 재건 총회가 열렸고 폐교됐던 경성신학교, 폐간된 잡지 ‘활천’이 복구됐다. 이때 교단 명칭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에서 ‘기독교 조선 성결교회’로 바꿨다. 김용은 집사는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는 영광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찾은 해방이던가? 신사참배와 공출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매 맞고 갇히고 모욕당하며 이뤄낸 평화를 위한 해방이 아니었던가? 그는 의미 있는 일을 하길 원했다. 그때 김용은 집사 가족들은 집에서 가까운 입암면의 천원제일교회에 출석했지만, 김 집사는 정읍제일교회에 출석했다.

제일교회는 정읍 시내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로(매계교회가 1900년에, 천원제일교회가 1904년에, 정읍제일교회가 1909년에 설립되었다) 최상섭 목사, 이시문 목사, 정읍 읍장 최인철 장로, 정읍지원장 홍재기 장로, 삼남병원 원장 정종실 장로 등 지역사회에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많았다.

해방 이후 정읍 시내는 피폐한 농촌에서 구걸하기 위해 읍내로 몰려나온 아동들로 정읍천 다리 아래 고아들이 넘쳐났다. 아이들은 주일이면 교회로 몰려와 손을 내밀었고 교회에서 주먹밥을 나눠주며 구호에 힘썼으나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면 아이들은 정읍역이나 시장으로 몰려가 “한 푼 줍쇼”를 외쳤다. 형언키 어려운 참상이었다.

‘저 가엾은 아이들을 어찌할 것인가. 곧 겨울이 닥칠 텐데 저 아이들을 버려두면 얼어 죽을 것이 아닌가? 나라가 가난하여 누구도 저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또 교회도 이제 막 자립하는 판에 구호가 쉽지 않다. 어떻게든 저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저들을 도우시리라.’ 정읍 여러 교회 장로들이 중심이 된 많은 유지들은 다양한 경험이 있고 믿음과 리더십이 뛰어난 김용은 집사에게 고아원 운영을 요청하였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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