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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창문 칼럼(60)

기사승인 [519호] 2021.06.09  15: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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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신학자이며 목회자인 김명혁 박사”

필자가 <한국교회 부흥운동의 주역,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을 출판하면서 남양(南陽) 김명혁 박사의 추천을 받았다. 역사학자이며 목회자인 그는 기도의 눈물이 많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교계에서는 역사적인 안목으로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일깨우는데 일조하였으며 한국복음주의협의회를 창설하여 한국교회 복음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남양의 생애와 삶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의 사역들을 살펴보면서 교훈을 삼고자 한다.

김명혁 박사는 1937년 도쿄에서 순교자 김관주(金冠柱, 1905-1950)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짧은 일본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11세까지 신의주와 평양에서 생활하였다. 그의 부친 김관주 목사는 일본으로 유학하여 도시샤대학교 법학과를 중퇴하고 도쿄신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경직 목사의 초청으로 1938년부터 신의주 제이교회 부목사로 사역을 시작하여, 9년 동안을 담임목회로 시무하였다.

1947년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나, 3.8선 이북에 소련군의 신탁통치로 공산화의 물결에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정권에 비협조적이라는 명분으로 그는 평양 외곽에 있는 사동 탄광으로 끌려가서 강제 노역과 모진 핍박을 받았다.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 가던 김관주 목사는 1950년 6월 23일경 그곳에서 순교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계속 법학을 공부했다면 출세를 할 수도 있었는데 주님을 만나 모든 것을 뒤로하고 신학을 하여 주의 종이 되었으나 공산정권의 만행으로 이북에서 목회사역에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순교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아버지 목사님의 모든 사역을 지켜보았던 김명혁 박사는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월남 할 것을 11세에 결심하게 된다.

그는 평안남도 안주군에 살 때에 온가족을 믿음의 가족으로 만들었던 할머니의 신앙을 이어 받아 어두운 밤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에 등불을 들고 전답을 걸어가 하나님께서 예배를 드렸던 그 때를 회상한다.

그의 할아버지도 영수가 되어 교회를 섬겼고 그 믿음이 흘러 세 아들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김영혁 박사의 부친이 맏아들로서 목회자가 되었고 다른 형제들도 장로와 목사가 되었다. 그의 부친은 평북 신의주에서 한경직 목사와 함께 목회를 하였으므로 그는 어린 시절 한 목사에게 신앙교육을 받았다.

남양이 한경직 목사를 지극히 존경하여 닮고 싶은 목회자였다. 김관주 목사는 일제에 협조하지 않고 타협이 없는 일관된 믿음의 생활과 목회로 인하여 수차례 감옥에 가서 고초를 많이 겪었다.

김명혁 박사는 초등부 시절을 평양에서 보냈다. 부친이 1947년부터 서문밖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으나 공산당에게 비협조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후에 김일성 주석의 외숙인 강량욱 목사가 부친을 회유했으나 거부하였다.

그가 11살 때 마지막으로 만난 아버지는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사동탄광에서 노동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1948년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주일을 제대로 지킬 수 있는 남쪽으로 간다며 사랑하는 가족들을 남겨 두고 어른들과 내려오다가 인민군에서 잡혔지만 혼자서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38선을 넘어왔다.

남양은 월남하여 영락교회에서 한경직 목사를 다시 만나 신앙생활을 하였고 학업에도 열중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대구 피난 생활 때에는 대구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부흥회가 오면 이성봉 목사가 강조하는 회개와 은혜 사모하는 것과 기도의 중요성을 배웠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김치선 목사가 목회하는 창동교회(대창교회)에 참석하면서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는 개척정신과 철저한 신앙생활, 봉사생활, 회개와 새벽기도, 전도의 영적 유산을 물려받았다.

김명혁 박사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영혼구원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대학교 1학년까지 초등학교 교실을 빌려 예배를 인도하였고 그 후 한양제일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목회를 하였다가 교회를 아는 전도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사학과에서 서양사를 전공하고 졸업하였다. 그는 기도 중 하나님께 소명을 받고 총신대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김 목사는 미국으로 건너가 12년간 유학생활 끝에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총신대학교 교수와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을 지냈다. 또한 영안교회와 강변교회를 설립하여 28년간 목회를 감당하다가 2008년에 은퇴하였다.

“한국교회에서 다시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와 같은 영적 거목이 나오길 간절히 기도한다”고 역설했던 김명혁 목사는 세월이 지난 지금은 강변교회 원로목사로서 전국에 있는 작은 교회를 순회하며 성경을 통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균형 잡힌 목회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진리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늘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삶과 사역에 있어서 겸손하며 무엇보다 타인을 섬긴다. 한국교회를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역에 젊은 후배 목회자들이 도전을 받고 영적인 힘을 얻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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