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빈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정빈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논설위원전 성결대총장, 교수 |
2. 복음 전도(Evangelization) 우선주의
그리하여 한국성결교회는 하나님만 오로지 의지하고 구원의 복음을 불신자에게 전해야겠다는 신앙 선교(Faith Mission)의 정신으로 오직 전도에만 주장을 삼고 목회를 하지 않고 10여 년 동안 선교 단체로 있다가 1921년 9월에서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로 개칭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정빈의 심중에는 어떤 특정한 교단의 교리 선전이나 교파의 교세 확장. 또는 서구 신학 사상의 단순한 소개나 무비판적인 이식이 아닌 일본 동경성서학원에서 배운 바 성서에 근간되는 사중복음 전파를 그의 최고, 최대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김상준과 함께 정빈이 초기에 전도 활동을 할 때 이들이 가졌던 두 가지 선교 원칙은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것이었다. 감신대 교수였던 송길섭은 다음과 같이 『韓國神學思想史』에서 말하고 있다:
정빈은 한말(韓末)이라는 불운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것에 대한 깊은 인식과 책임을 통감하여 목회 활동에 앞서서 선교 활동에, 이차적인 교육보다는 일차적인 직접 복음전도에 주력하였다. 그래서 밤에는 노방에서 가두 전도를 하거나 부흥집회를 열어 결신자를 얻고 낮에는 이들의 가정을 호별 심방하여 특정한 교파에 상관없이 건전한 교회이면 가까운 교회로 인도하여 주었다. 다음의 글은 이것에 대해 잘 말해준다:
이 명칭을 사용하게 된 동기는 동양선교회 창립자 카우만 길보른 총리들의 정신을 따라 교파를 세운다든지 혹은 선교 사업을 한다는 사업적 정신보다도 순전히 구원의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들에게 전하여야 되겠다는 구령열에 불타서 일어난 단체이므로 명칭까지도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이라고 명명(命名)한 것이다. 따라서 전도방법도 간접적 방법을 지양하고 직접적 방법을 택하여 밤에는 노방에서 악대(樂隊)를 앞세우고 선전하여 회관으로 모으고 복음을 외쳐 결심자를 얻고 낮에는 그들을 방문하여 교파에 구애됨이 없이 가까운 교회로 지도하곤 하였는데, 이 전도가 매일 계속하게 되었으니 초시대 전도자들의 구령열은 대단하였던 것이니 교회 조직이나 교세 확장이 아니고 일구월심(日久月深) 구령전도(救靈傳道)에만 전력(全力)하였으니 이것이 성결교회의 모체(母體)인 복음전도관(福音傳道館)이다.
그러나 20여년이란 기간 동안 앞서서 선교사들의 도움 아래 이 땅에 교회의 뿌리를 내리고, 1893년 장·감 위주의 선교 구역 분계선이 그어지며 간접 전도가 이루어진 상태에서, 또한 1907년 동양선교회로부터 정식 선교사가 파송되기도 전에 시작한 초기 선교의 어려움과 열세를 생각해 볼 때 당시 정빈이 가졌던 복음 전도 우선의 직접 전도 방법은 매우 인상적이고 효과적인 전도 방법이었고, 당시의 정빈과 김상준이 취할 수 있었던 최선의 전도 방법이었다. 다음의 글은 초기 복음전도의 부흥의 역사를 보여 준다:
정빈이 1919년 파송받아 사역한 인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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