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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4)

기사승인 [489호] 2020.08.05  17: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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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 복음주의 신학 강조한 김영한 박사

2. 보수적, 성실하고 실천적 인격 신앙

고봉은 그 다음 해인 1931년 영재형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터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1929년 메이천 등 프린스턴 구학파 학자들이 세움) Th. M. 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생활을 하며 오직 학업에만 매진한 끝에 1933년 Th. M.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정통개혁신학을 배웠다. 고봉은 다시 텍사스주 달라스에 있는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의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으며, 여기서 구약학을 전공하여 1935년에 신학박사 학위(Th. D.)를 취득하였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정식 구약학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었다.

고봉은 달라스신학교 유학시에도 외부와 단절하여 오로지 학교 기숙사, 강의실, 도서관, 식당에만 오가면서 학업에 매진하였다. 자신의 신학공부를 민족 복음화를 위한 일환으로 생각하고 외로움을 참고 인내하면서 형설의 공을 이룬 것이다. 그리고 당시 모세오경 저작설을 부인하는 역사비평학이 지배하는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의 풍토에서 모세5경의 모세저작설을 학위논문을 쓸 만큼 보수적인 신앙과 신학을 유학생활에서 실천하였다. 그가 달라스에서 공부했을 때 달라스는 세대주의자와 복음주의자 학자들이 함께 가르쳤다. 그러나 고봉은 이미 고향교회에서부터 신앙생활에서부터 목사안수와 신학석사까지 장로교회와 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 고배신학교,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획득하였기 때문 그는 세대주의나 자유주의에 타협하지 않고 역사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3. 초지일관한 청교도적 회개 부흥 신앙 사상

고봉은 당시 캐나다에서 함흥으로 처음으로 파송된 영재형 선교사의 청교도 신앙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함경도 지역에 파송된 캐나다 선교사들은 자유주의적이었다. 영재형 선교사는 뒤늦게 파송된 진보적 선교사 윌리엄 스코트(William Scott, 1886-1979)와 심각한 신앙적 갈등을 겪었고, 이에 대해 선교부에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그런데 선교부는 영재형 선교사를 신앙의 불모지인 일본으로 좌천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고봉은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를 따라서 온 가족이 일본으로 떠났다. 고봉은 일본 고베신학교에 입학하였고 이 때부터 영재형 선교사와 선교활동을 함께 시작하였다.(김동화, 『한국의 예레미아 김치선 박사를 추모하며- 나에게 있어 영원한 것』, 서울: 기독교연합신문사, 1998, 45-46.) 그는 보수적 신앙을 가진 양아버지 선교사를 평생 섬기면서 그로부터 복음 사역자로서의 인격과 영성을 성실하게 닦았다.

고봉의 신앙의 열정은 10살 때 마을 서당 훈장 김응보 옹의 영향 아래 신앙으로 입문 후 흔들림없이 초지 일관하였다. 16세 때 영재영 선교사를 만나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실천하는 정통개혁신앙의 훈련을 받으면서 20세에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옥고를 치르면서 하나님의 종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출옥 후 영생중학교에서 학업을 끝낸 후 연희전문을 거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엄재형 선교사의 권유에 따라 일본 고배신학교로 진학하게 되었고, 목사 안수 후에는 미국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와 달라스에서 신학공부를 마치고 다시 고베와 동경 신주구에서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리고 해방전 귀국하여 남대문교회에서 목회하면서 대한 신학교를 설립운영하고 창동교회 개척, 한양교회 목회, 송파 중앙교회 개척과 300만 부흥전도단 창립으로 초지일관하였다. 고봉의 독특성은 최초의 미국 구약학 신학박사를 한 그의 학문적인 논리보다는 눈물로 청중의 영혼과 마음에 호소하고 감동을 주는 초지일관하는 청교도적인 신앙의 열정이었다.

고봉은 기도의 사람으로 3백만 부흥운동을 전개하여 민족 복음화운동에 앞장 섰다. 그는 6.25 한국전쟁 이후에 나타난 민족의 위기를 직접 체험하면서, 한국의 예레미아로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민족의 파수꾼이 되어 한(韓)민족과 한국교회가 범한 우상숭배의 죄를 철저히 회개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그의 부흥설교의 주제는 회개, 부흥, 성령이었다. 그는 눈물로 기도하고 전국을 돌면서 전도했다. 해방 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 민족이 살길은 오직 기도, 회개 그리고 기도뿐이라고 천명하였다. 그는 단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부흥운동이 아니라 민족을 살리기 위한 한국교회의 내면적 성장을 위하여 부흥을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교회 부흥운동도 말씀에 입각한 회개 운동이었기 때문에 개혁신앙에 입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김영한 박사(숭실대 명예교수)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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