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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高峯) 김치선의 개혁신학 사상의 특징(3)

기사승인 [488호] 2020.07.22  16:5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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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통 복음주의 신학 강조한 김치선 박사

2. 보수적, 성실하고 실천적 인격 신앙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은 달라진다. 선교사 집에서 잡일을 도우면서 선교사와 부인의 비서 역할까지 했다. 10대 고봉은 선교사가 세운 영생중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선교사 집안일을 도우는 가정 총무 역할을 했다. 요셉처럼 힘든 일을 하면서도 불평하지 않고 감사하며 착실하고 정직하고 예의 바르고 공손하게 일을 처리하여 선교사 부부의 사랑을 듬뿍받았다.

고봉은 서당에서 배운 실력으로 영재형 선교사가 세운 장로교 선교학교인 영생중학교에 입학하였고,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당시 선교학교는 민족정신이 강하게 강조되는 곳으로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당시 영생중 · 고등학교 내에서는, 학생들이 비밀리에 한국 애국자들의 지시를 받아 활동하고 있었는데 고봉 역시 그런 학생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함흥지역 학교 비밀학생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1919년 3월 1일에 있을 민족의 봉기를 주도적으로 준비하고 추진하였다. 고봉의 참여는 민족 정신이 투철한 영재형 선교사의 신앙 훈련에 영향을 받았은 것이다. 고봉은 이 3.1운동 참여 일로 인하여 일경에게 체포되어 심한 매질과 고문을 당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20살의 나이로 함흥에서 서울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1년간의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그 곳에서 그는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하였다고 한다. 1년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 그는 출옥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였다.

1년 후 김치선은 출옥하여 함흥으로 돌아와 영생중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했고 1922년 3월 13일 23세의 나이로 영생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 김치선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이 때 고봉은 학기 중에는 서울 연희전문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고, 방학이 되어야 함흥으로 돌아와서 영재형 목사의 일을 도왔다

1923년 어느 날 방학을 맞이하여 함흥의 집으로 돌아와 영생고등학교 옆에 세워진 신창리 교회에서 새벽기도를 하고 있던 고봉은 밖에서 들려오는 “불이야! 불이야!”하는 다급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소리는 다름 아닌 영생 중·고등학교 쪽에서 들여오는 소리였다. 김치선이 이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학교는 이미 커다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이 불은 당시 서양 사람인 영재형 목사가 한국 학교인 영생 중 · 고등학교의 교장이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이, 영재형 목사를 죽이기 위해 놓은 불이었다. 그들은 영재형 목사를 교장실에 가두고 밖에서 문을 잠근 후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불을 질렀던 것이다. 고봉은 이불에 물을 부어 자신의 몸에 뒤집어 쓰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 선교사를 구출한다. 그는 자기를 키어주고 공부시켜준 은인(恩人)을 위기의 순간 살렸다는 보은의 자긍심을 가졌다. 이처럼 고봉의 생명을 건 구출작전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영재형 선교사는 이 일 후에 고봉을 자신의 양아들로 삼고 더욱 특별히 사랑하며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선교사 부인은 너무 놀라 화병을 얻어 별세하게 된다. 별세 전에 부인은 남편에게 “치선이를 끝까지 돌보아주고 공부시켜 주세요!”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 선교사는 그 유언을 실천하여 고봉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 이어서 1930년대 미국 달라스신학교에 유학시켜 1935년 한국인 최초로 신학박사를 받게 지원을 해준 것이다. 1949년 영재형 선교사가 별세할 때 다음의 유언을 남겼다: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한 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 치선이를 얻은 것이다.”

1927년 3월 7일에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평양에 있는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평양신학교 생활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1928년 일본에 있는 한인(韓人)들을 선교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건너간 영재형 선교사가 고봉을 일본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고봉은 일본 고베 현(縣)에 있는 고베중앙신학교(現, 개혁파신학교)에 편입하였고, 그곳에서 영재형 선교사를 도와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일본에 건너 온지 2년만인 1930년 2월 23일, 고봉은 31세 나이로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고 영재형 선교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재일 조선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때 그의 나이 31세였다. <다음호에 계속>

김영한 교수(숭실대 명예)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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