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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교육신학사상의 역사적 배경①

기사승인 [418호] 2018.09.05  1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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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중계 / 코메니우스연구소·기독교학술원,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 (1)

코메니우스 교육신학사상의 역사적 배경①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 생애와 관련하여

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소장 정일웅 박사·전 총신대학교 총장)와 기독교학술원(대표 김영한 박사·숭실대학교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은 8월 20~22일, 사흘간 제주시 올레기도원 겸 오라수도원에서 ‘한국교회,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라(행 2:43~47)’는 주제로 ‘2018 제3회 목회자 콘퍼런스’를 갖고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 공교회성 회복 방안을 모색했다.

이번 콘퍼런스 소식을 들은 독자들이 “많은 목회자들이 전도 부흥 비법과 건축 등 세미나로 몰려가는 현실”이라며 “이런 세태와 달리 현재 한국교회가 기독교회의 공동체성 및 공공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는 모습을 진단하고 극복 방안을 모색한 진지한 세미나에 거리상 참석 못했으나 지상중계라도 소개해 달라”고 요청해와 강의 전부를 현장 취재 지상 중계한다.

<편집자 주>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사상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속하여 있던 보헤미아 형제 연합교회의 관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초기에 발표한 교육적인 책과 문서들을 통하여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교육학자로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로 그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단순한 일반교육학자가 아니라, 그의 교육학의 핵심 사상은 역시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사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의 교육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의 학문적인 성장배경은 역시, 그가 속했던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와 깊이 연관되어 있으며, 그 교회의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할 때, 코메니우스의 교육과 신학사상은 더 깊은 이해를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뜻에서 코메니우스와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의 역사적 배경을 다루어보기로 한다. 그리고 먼저는 역시 루터보다 약 100년 먼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보헤미아의 요한 후스 (J.Hus)에 의한 종교개혁운동의 역사를 말하고, 다음으로 보헤미아형제연합교회의 설립과 교단발전사, 그리고 17세기 유럽과 코메니우스와의 관계를 차례로 다루게 된다.

1. 요한 후스(.Hus)의 종교개혁과 후스파 운동 

요한 후스(J.Hus:1369-1415)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약 100년 전, 보헤미아(체코)의 프라하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 당시 로마가톨릭교회의 비성경적인 신앙의 가르침과 교황제도와 그 제도가 초래하는 문제 등에 대항하여 교회개혁에 대한 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

후스는 1400년경 신학을 공부하고, 사제가 되자마자, 1402년에 베들레헴교회의 설교자로 임명을 받게 되었으며, 곧 이어 프라하대학에 신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후에 총장직에 올랐고, 1412년 그곳에서 추방될 때까지 약 10년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가 설교했던 베들레헴까펠레(예배당)는 실로로마가톨릭교회를 향한 종교개혁을 부르짖게 된 중심지였다. 후스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정신을 영국의 종교개혁의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 (J. Wyclif: 1320-1384)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그 당시 위클리프는 기독교신앙의 유일한 규범은 오직 성경뿐임을 확신하고, 일찍이 성경에 근거하여 영국에서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 1세대의 선구자 였다. 후스가 위클리프의 영향을 받아 초기에는 가톨릭성직자들의 비윤리성과 성직매매 등을 비판하면서 교회갱신을 부르짖었으나, 후에 그는 구체적인 개혁으로 예배에서 자국어로의 설교와 성찬에서 떡과 잔을 나눌 것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순종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국 후스는 교황 23세의 십자군 면죄 건에 대한 강한 비판으로 사제직에서 파면 당하였고, 프라하에서 추방당 했다. 그런 후에도 그를 따르는 귀족들의 도움으로 그는 민중집회를 개최하고 설교를 계속하였으며, 잘못된 비성경적인 로마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글을 집필하였다.

마침내 로마가톨릭의 교황권에 대한 비판으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 제소되었고, 거기서 이단자로 정죄되어 1415년 7월 6일에 화형을 당하게 된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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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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