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호남 최초의 전킨선교사 연재(4)

기사승인 [520호] 2021.06.24  14:27:17

공유
default_news_ad2

- 전킨의 교육환경

전킨 선교사  (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언더우드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6년간 한국에서 활동했던 사진들을 보이며 낱낱이 보고에 임하였다.
“신학생 여러분, 지금 한국은 여러분을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예의가 바른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교가 왕성하고, 일찍이 중국을 통해서 불교가 들어왔기에 역시 불교의 사찰이 여기저기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샤머니즘이 왕성하여 농촌, 산촌, 어촌 할 것 없이 온통 샤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성이 강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언더우드가 환등기로 보여주는 한국의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윤치호가 외치는 연설을 들으면서 전킨의 마음에는 한국선교에 대한 열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는 북장로교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졸업반인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도 있었다. 그는 곧 남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한국선교를 신청하였다. 하지만 남장로교 총회는 테이트에게 한국선교 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비록 무명의 신학생이 제출한 선교 신청이지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는 그냥 묵살할 수가 없어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실무자는 실행위원회 자리에서 그때 일어났던 사건에 대해서 자세하고 보고하고, 한국선교 지원서를 보여주었다. 부장은 실무자의 보고를 다 청취한 후 여러 위원들의 의견을 물었다.
 “부장님,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입니까?”
“한국은 중국과 일본사이에 끼여 있는 조그마한 나라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파송한 언더우드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지역이며, 이미 미국 북장로교에서 여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성공적으로 선교 사역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장의 자세한 보고가 있었지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는 우선 한국에 파송할 만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더욱이 한국을 자세하게 이는 위원이 한 사람도 없어서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한편 전킨과 레이놀즈 등은 한국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장로교 선교부에 청원을 한 후 함께 한국선교의 실현을 위해 기도회를 가졌다. 이들도 앞서 테이트처럼 남장로교회는 한국선교 계획이 없다는 답장을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굴하지 않고 남장로교인 선교 기관지인 『The Missionary』 1892년 2월호에 “왜 우리는 조선에 가기를 원하는가? (Why We Wish to Go to Korea?)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한국에 보내 줄 것을 호소한다. 함께 모여 간절히 기도하면 그들은 드디어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
  ”목사님, 저는 학교에 돌아가서 계속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기도에 확실하게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날 따라 내슈빌의 가을 날씨는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붉게 물든 나뭇잎들은 찬연한 가을 향기를 풍기면서, 테이트 신학생의 앞길을 인도하듯 태양은 그를 비추고 있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찬송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참 빛을 받은 우리 곧 오라 부른다.”
그 이후부터 테이트는 계속 한국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만나는 신학생들에게 그들에게 한국선교사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한편 매일 기도하고 있던 전킨은 기숙사와 교실을 오고 가면서 혹시라도 선교사로 나갈 준비를 하라고 하는 서신이 오지 않았을까 하여 하루에도 여러 차례 우편함을 뒤져보곤 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느 날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서신이 왔다. 전킨은 떨리는 마음으로 그 서신을 뜯어보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 해외선교부 실행위원회에서는 장시간 그 문제를 놓고 회의를 하였지만,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한국에 대한 이해가 전무한 이유로 학생이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로 지원하면 적극 검토하여 선교사로 파송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이 서신을 받은 즉시 그는 우편함 곁에 덜썩 주저 앉고 말았다. 하늘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귓가에 이런 말이 스치고 지나갔다. “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한국선교를 자원한 일곱 명은 날마다 기도회를 가졌다.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 한국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길을 열어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전킨은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통지를 자세히 보았다. 확실하게 선교사로 선발되었다는 글귀가 역력하게 그리고 또렷또렷하게 담겨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이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일곱 명의 선교비를 전액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선교비 지원을 월 100불 500불이 아니라 왕복 교통비, 생활비, 자녀 양육비까지 거금이 소요되는 것이라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한꺼번에 일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