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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결교회 성장사(42)

기사승인 [513호] 2021.04.14  16: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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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편> 한국성결교회 성장기

창립 제114주년 차에 이른 한국성결교회의 지나온 고귀한 역사를 기독교헤럴드가 다시 조명하여 전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상기시킴으로서 성결복음을 새롭게 교훈 삼고자 여기에 안수훈 목사의 저서 ‘한국성결교회성장사’를 연재한다.

제2장 교단의 수난기

제3절 피란 중의 총회(2)

6.25 사변으로 피난 중에도 성결교회는 대전 이북에 있던 모든 교회가 부산과 거제도 그리고 제주도로 피난하여 신자들과 교역자들이 집결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거처와 식생활 문제로 고난을 당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성결교회는 1951년 5월 부산에서 피난 중 총회를 개최하고 전쟁으로 겪고 있는 여러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3가지 해결책을 결의했다. 1) 피난교회수습문제, 2) 피난교역자 구호문제, 3) 피난신학교 개교문제 등이었다.

그때 교세로는 1951년 12월 31일 통계에 따르면 교회 265개, 신개척 31개 교회, 목사 100명, 남전도사 78명, 여전도사 70명, 학습교인 3,005명, 세례인 7,025명, 구도자 7,531명, 모두 17,809명이었다.

피난 총회를 마친 뒤 총회의 임시사무실을 부산 ‘영주동교회’로 정하고, 교단 사무와 구호사업을 맡아 업무를 보는 한편, 교회 재건과 개척에 더욱 힘을 썼다.

제4절 피난 중 신학교 개교

부산에서 1951년 피난 중에도 총회를 개최하고 결의한 바 ‘피난신학교’가 O.M.S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부산 ‘온천동 교회’에서 1951년 6월 14일에 개교식을 하게 된다. 그러나 강의실이 부족하여 신과는 부산에서, 여자부 별과는 마산에서 임시교사를 마련하여 수업을 시작하였다.

이때 신학교에 입학한 학생 수가 무려 150명이나 되어 교실수가 부족하여 수업에 지장이 많아 할 수 없이 부산 금정산 밑에 공터를 임대하여 임시교실 두체를 건축하고, 신과와 별과를 합하여 1952년 새 학기부터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또 한가지 고민이 있었는데 신학교 강의실은 갖추었으나 학생을 가르칠 교수가 부족한 실정이라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박현명, 김유연, 최석모 등 유능한 교수들이 납북되어 공백이 생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부산에서 목회하는 몇몇 목사들을 교수로 뽑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수고한 교수들은 이명직, 김응조, 문이호, 황성택, 이천영 교수이고, 1952년에 뽑은 교수는 김창근, 장창덕, 황경찬, 오영필 교수가 힘을 보탰다. 그렇게 활성화되자 1953년 신학기에는 학생수가 200여 명에 도달하게 되어 풍족했지만, 전쟁 중이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 학비를 제 때에 납입하지 못하게 되자 학교 운영은 어려움을 보게 되었다.

제5절 대구신학 중심으로 분열

성결교회는 1935년 제3회 총회에서의 사건으로 정남수와 곽재근 일파가 9개 교회를 분리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설립한 뒤, 두 번째로 성결교회가 대구신학을 중심으로 분립하게 된다. 이 사건의 중심인물은 대구의 ‘공평동 교회’ 최정원 목사가 자기 교회 안에 성경학교를 세우고, 몇 년을 지내는 동안 ‘대구신학교’로 발전시키게 된다.

이때 ‘대구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이 교회를 개척하여 한 그룹을 형성하더니 ‘성결교회 총회’ 안에서까지 그 세력이 힘을 쓰기 시작하여 매번 불화를 일으키는 화근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교단 내 지도자들이 ‘대구신학’을 그대로 두면 앞으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할 것으로 보고 우려하여, 최정원 목사를 ‘서울신학교’ 교수로 불러들였으나, 최정원 목사는 계속에서 ‘대구신학교’를 이끌면서 문제를 일으키자 교단에서 ‘대구신학교’분리와 최정원 목사를 사생활 문제로 1952년 제8회 교단총회에서 파면시키게 되었다.

이때 최정원 목사를 추종하는 10여개의 교회가 교단을 이탈하여 새로운 조직을 하게 되었고, 이른바 ‘임마누엘교회 사건’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정원 목사 일파가 새로운 교단으로 ‘임마누엘교회’교파를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하고 대부분의 교회가 장로교회와 통합하는 등 흩어지게 되어 결국 ‘대구신학’마저 문을 닫게 되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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