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서정 구구소한도(九九消寒圖)
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
겨울은 수묵화다. 늘푸른나무조차 깊은 겨울에는 그 푸르름을 잊어버린다. 상록수라 하여 그 초록을 어디 초록이라 할 수 있겠는가. 겨울이 깊어 갈수록 묵의 색조차 옅어지고 선들만 남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작은 시선 ‘일엽지추’에 비추어본다면 그 무엇이든 깊어질수록 자신의 색채를 잃어가는 일이 아닐까, 무엇이 ‘되어감’으로 무엇을 잃어가는 일, 존재를 완성해 가는 것이 어쩌면 가득 찼던 존재성을 끊임없이 잃어가고 버려지고 퇴색해 가는 게 아닌가. 우리는 삶을 살아간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한 여정인 것처럼, 그것도 우회나 회차가 없는 직선의 길.
어제 오후 해 저물 무렵 공원을 걸었다. 겨울나무들은 빈몸을 하고 의연하게 서 있었다. 겨울 속 나무들은 공평하다. 이파리 넓은 오동나무도 이파리 가느다란 회화나무도 느티나무와 대왕 참나무도 다들 비슷비슷해 보인다. 어쩌면 잎이나 꽃으로 애써 구별 지었던 일들을 회개라도 하듯이 그들은 손을 높이 들고 하늘을 향하고 있다. 그래선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한 하늘을 품고 있다. 어느 순간에는 하늘뿐 아니라 저물어가는 해를 품기도 했다. 아, 개밥바라기의 시간, 별이 나타나자 서슴없이 그 별을 품기도 했다.
벗은 몸을 하고 선 나무들은 얼핏 죽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저기 저 벚나무, 저 검은 가지, 유별나게 가느다래해서 바람 불 때마다 흔들리는 저 가지 속에 여린 꽃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안다. 꽃을 사랑한다면서 꽃만 즐긴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꽃을 바라보다 보면, 꽃 지는 것이 보이고 열매가 이어지고 푸르른 잎에 눈빛이 반짝이게 되며 꽃 진자리조차 보이게 된다. 나무의 목피와 옹이조차 만져보게 된다. 한여름 아주 건강할 때 가진 저 아이를 피어나게 하려고 나무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리고 쉼 없이 인내한다. ‘동아’를 위해 이파리를 떨어낸다. 맨몸으로 추운 겨울을 견디며 겨울눈에 말한다. 나도 견디니 너두 견뎌야 한다. 사랑이 공존이라는 것을, 함께 한다는 것을, 겨울나무는 몸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납월이면 그렇다. 저절로 초록이 고파진다. 아니 집에도 제법 여러 그루의 나무 화분이 있고 화원이나 식물원에 가면 초록이 가득하며 하다못해 딸기를 먹고 난 후 접시 위에 딸기 꽃받침을 뒤집어 놓으면 얼마나 예쁜 초록색이 펼쳐지는지...그런데도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초록에 대한 갈증이 있다.
지금과 다른 시절의 옛날 사람이라면 아마 그 갈증은 더 깊었으리라, 그래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 일은 동지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여든 하루가 지나면 끝이 난다. 구구소한도. 흰 눈 쌓인 것처럼 하얀 화선지 위에 매화나무를 한그루 그린다. 그리고 그 고목 등걸에 여든한 송이의 매화를 그린 후 날마다 한 송이씩 색칠 해서 매화를 피워내는 것이다. 오늘은 바람이 세차니, 바람이 들어있는 매화를 그렸을 것이고 눈 내리는 날에는 눈이 깃든 매화를 그렸을 것이다. 비 오는 날에는 매화의 암향이 짙어지니 향기 깃든 매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여든 하루가 지나고 창문을 열면 매화꽃이 피어나 있다. 이렇게 아름답고 서정적인 기다림이 어디 또 있을까?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다가오면 그 봄은 또 얼마나 깊고 그윽할 것인가.
새해에는 가능한 한 미술관을 더 자주 들락거릴 것이다. 건강해지려면 몸을 움직이고 걸어야 하듯이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정신의 걷기’를 요구한다. 감상이라는 고착된 자리에서 벗어나 작품 속으로 옮겨오라고 명령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어디 있으랴만 새롭지는 않더라도 수많은 다른 각도와 시선을 열리게 한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고백은 지극히 현대 미술적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열리게 하며 삶을 철학의 정점으로 이끈다. 자유로운 자리이며 삶을 초월한 지점이다. 그의 손을 더욱 붙잡기, 그래서 나도 죽음을 생각하며 삶 속에서 자주 서성이려고 한다. 역지사지를 기본으로 도긴개긴에 고개 끄덕이며 판단하지 않기! 정죄하지 않기! 그리고 가능한 한 다정하고 따스하기! 나의 작은 새해 슬로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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