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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궁 목사의 이야기 교회사 <9>

기사승인 [609호] 2024.03.20  22: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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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진짜 교인이야?(2)-몬타누스파

박용궁 목사(D.Min., 많은샘교회 담임, 미국 루터신대(LTSP) 졸업)

몬타누스파는 172년, 서부 소아시아의 브리기아에서 시작되어, 207년경에는 북아프리카에서 맹위를 떨친 이단입니다. 창시자 몬타누스(Montanus)는 이방종교의 사제였다가 기독교로 돌아선 인물입니다. 그는 뜨거운 신앙을 모토로 하여 교회의 타락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와 대조되는 모습으로 156년경부터 엄격한 윤리 생활과 금욕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한 번은 결혼할 수 있다 치더라도 영적인 것을 위해서는 결별할 수도, 온전히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하여 결혼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또한 순교가 권장되며 순교를 피하는 것은 죄라고 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순교의 각오로 세상과 결별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하며 천년왕국의 도래를 꿈꿉니다. 이것은 자신이 계시의 완성자이며 성령의 예언자이기에 주장한다고 전파합니다.

몬타누스에게는 막시밀라(Maximilla)와 프리스킬라(Priscilla)라는 두 여성 동역자가 있습니다. 몬타누스는 보혜사(Paraclete) 자신이며 이 두 여인은 이를 증거 하는 여선지자라 합니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통해 성령의 시대가 도래 했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지금에도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몬타누스와 두 여선지자를 통하여 새 예언을 주신다고 주장합니다. 몬타누스파는 자신들이 성령과 예언의 은사를 지녔기에 진리의 증거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몬타누스는 새 예루살렘이 페푸자(Pepuza) 도시에 임한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그곳에 모여 금식하며 종말을 기다리라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즉시로 예수님과 사도의 말씀들과 동등한 권위로 받아집니다. 뜨거운 영성이 목회자의 권위이니까 쉽게 받아집니다. 왜 이런 주장이 설득력 있을까요? 타협을 모르는 그들의 강인함이 영적으로 비춰진 까닭입니다.

예로써 로마 군인은 복무기한이 16년에서 25년까지 늘어납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최전선에서는 제대가 쉽지 않고 평생을 복무하는 경향이 대다수입니다. 거기에다가 군인은 전쟁에서 살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군인은 예수를 믿거나 세례를 받아도 직업을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참전할 수밖에 없기에 살인의 문제는 신앙의 갈등이 됩니다. 탈영하고 국가의 권위를 거부해야 할까요? 당연히 몬타누스파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데 군인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모습에 207년에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조차 동조합니다.

그런데 왜 쇠퇴할까요? 예수님의 재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인정할 때까지 이들은 페푸자를 중심으로 엄격한 생활을 하며, 세상의 비난을 받는 것이 순교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자신들을 결속합니다. 몬타누스파는 대체로 5세기까지 아프리카에 존속합니다.

이에 반대한 교회는 회의를 통해 편협한 종교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성경의 중요성을 다시금 부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도덕적 이완을 묵과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높은 차원의 도덕 생활과 낮은 차원의 도덕 생활에 대한 구분이 생깁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도 있고 아직 믿음이 약한 사람도 있다는 인정입니다.

이제 목회자의 권위는 뜨거운 영성이 아니라 개교회 중심보다는 전체 교회의 회의를 인정함에 있습니다. 목회자의 호칭으로 장로(presbuteros)는 장로회의 구성원이자 공동체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20장 17, 28절에 따라 감독(episcopos)이라는 용어가 생깁니다. 장로가 존경받는 공동체의 어른이라는 보편적 의미라면, 감독은 양떼를 돌본다는 목회적 의미가 강합니다. 감독은 회의를 주재하는 자로 교회의 구심점입니다. 지금의 당회장과 유사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원을 소유한 집단으로부터 구원을 보장해 주어야 하는 집단으로 인식됩니다. 이를 위해 교회회의, 즉 공의회가 발전하게 됩니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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