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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작가의 작품분석 / 작가 김현희

기사승인 [610호] 2024.03.29  19: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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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고… 감상·비평

러시아에 잠시 산 이력으로 ‘시베리아’ 하면 생각나는 말이 있다. '강제노동수용소'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 그래서 유형지로 정해진 걸까?

그 시베리아에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을 선교사로 사역하시는 부부의 일상을 들어보면 내가 살던 곳이랑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열악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현관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로 쌓이기에 그냥 감옥 아닌 감옥에 갇히는 형국이다. 눈을 치우다 보면 ‘노동은 기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고통스럽다고 한다.

그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선교사들의 기도와 열정은 동토를 녹여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선교의 꽃으로 피워 마침내 영혼 구원의 열매를 결실하는 걸 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형 미하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열악한 유형지 4년이 산 채로 관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울타리로 장벽을 세운 요새 안쪽에 마련된 감옥, 이름하여 “죽음의 집”은 살아 있으나 죽은 집으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과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거기는 인내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다. 이곳의 죄수들은 모든 권리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로 사회로부터 격리된 채 심지어 그 버려진 증명으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중한 죄수도 있다.

유형살이는 한 번도, 1분도 나 혼자 있을 수 없는 고통이란다. 강제로 욱여넣은 단체 생활이니 가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다. 한국의 청년들이 군대 생활에 대해 갖는 거부감도 그런 연유가 아닐까. 가장 무섭고 가장 자연에 거스른 행위와 가장 터무니없는 살인에 관한 이야기를, 어린애처럼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참지 못해 말하는 것을 들었던 곳은 감옥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멸이다! 인간은 모든 것에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이며, 나는 이것이 인간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한다."

감옥도 사람이 사는 곳이니 술과 담배를 비롯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돈으로 살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돈은 주조된 자유'라고 했듯이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귀중하다. 죄수들에게는 돈을 소유하는 일이 불법행위이고 발각되는 날에는 몰수와 체형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이 돈에 몰두하는 것은 그것이 돈 이상으로 귀하게 여기는 절정의 가치, 바로 자유를 한순간이나마 누릴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성탄절을 앞두고 연극공연을 하는 죄수들의 열정과 그 작품을 바라보는 죄수들의 모습이다.(pp247~252) "주위의 모든 압박과 구속된 생활의 무거운 짐을 잊고 잠시나마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이 허락되고,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커다란 연극공연이 허용되었다고 상상해 보라"

그렇게 그 고통스러운 유형지에서 시간이 흘러 마지막 해인 4년 차에는 제법 그 생활에 익숙해졌다. 따라서 지나온 3년보다 훨씬 수월하게 지낼 수 있었다는 것만 기억된다고 했다. 거기서 결국 자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 준 친구들과 지기들이 생겼기 때문이란다.

유형지에서 벗어나기 전 자기 발목을 옥좼든 족쇄를 바라보던 화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지금까지 그것들이 내 발에 있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1854년 2월 도스도예프스끼는 유형지에서 출감하고 세니팔라친스끄 수비대대에 배속되어 1859년 4월, 5년여의 집단생활까지 마치고 병역에서조차 자유를 얻는다. 그해 12월, 10년 만에 뻬쩨르부르그로 귀환한다.

러시아 최초로 감옥과 유형지 생활을 묘사하고 있는 ‘죽음의 집의 기록’은 4년간, 유형지의 생생한 체험을 담은 살아 있는 기록이다. 1860년 9월 검열에서 통과되어 <러시아 세계>지에 서론 부분이 실리고, 1862년에 가서야 단행본으로 출판될 수 있었다. 그의 어떤 작품보다 전기적 사실과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있다.

죽음의 집부터 시작되는 화자인 ‘나’ 고랸치꼬프의 서술은 아득한 시간의 진공, 몸서리쳐지는 참혹한 주변의 세계, 이상스러운 가족들의 심리, 그들이 저지른 죄와 벌에 대한 철학적 명상들, 간간이 삽입되는 서정적 자아의 반추 등을 기억이라는 시간 속에서 재조명한다. 그것은 회상 속에서 다시 체험되는 세계지만, 그 기억 속의 시간은 논리적이고 인과적이고 시간적 질서가 아니라, 꿈같은 시간 속의 풍경으로 그린다. 그 기억은 꿈과 같지만 단조로운 감옥 생활의 시간들을 플롯 화 할 수 있는, 그날이 그날 같은 모든 일상생활을 세공해서 반짝이게 만드는 연마기 같기도 하다. 그에게 기억은 서술의 내적 동력이다. 동시에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 묘사를 초월한다. 소설 작품이 갖는 상상력의 산물로 예술적 기록이다.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어도 잊을 수 없는 유형지의 고통스러웠던 기억들, 죄수들은 욕설의 변증법 자이자 욕설을 학문과 예술의 경지에까지 승화시키고 있는 자유를 상실한 인간들이며,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는 것을 최상의 미덕으로 여기고, 허세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인간들이다. 감옥에서의 노역이 일 자체의 어려움보다는 강제적이기에 더욱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화자는 살인범, 강도, 화폐 위조범, 방화범, 도둑 등과 같은 다양한 죄수들과 부대끼면서 죽음의 집의 심연 속으로 다가가고 있다.

죄수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먼저는 자기 범죄에 대해 뉘우침 없이 오히려 정당했다고 생각하는 부류고 흔하지 않지만 다른 한 편은 법이 부과한 가혹한 형벌보다 더 무자비하게 자신을 판결하는 사람들이다. 동일한 범죄에 대해서도 형벌이 불공평하게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화자 고랸치꼬프는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사회 고발인 셈이다.

죄수 대부분은 자기의 죄를 스스로 변명하거나 정당화하고 사회로부터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형벌을 집행하며 권력을 행사하는 이들이 자신들과 상반된 귀족 계층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기들의 수형 동료인 고랸치꼬프가 귀족 출신이라는 이유로 적의를 드러낸다. 귀족층인 화자는 민중 계층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게 쉽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화자는 감옥의 지휘관인 소령이 법대로라는 명목으로 죄수들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가혹 행위와 규칙만을 고수하는 억압적 태도를 보면서, 인간적인 것, 인간적인 이해라는 것이 무엇이며 죄수들에게 어떠한 심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 상식이나 판단이 결여된 법률 적용은 인간을 교화시킬 수 없고, 단지 제도적인 구속일 뿐 아니라 새로운 범죄자를 만들어내는 정치적 도구일 뿐이다. 화자는 인간은 인간으로 존중될 때만 그가 상실했던 본연의 인간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인간적 가치 존중과 인간적인 대접만으로 오래전에 신의 형상을 상실했던 사람들조차도 참 인간으로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종교적 참회와 고난이 수반되지 않은 형벌은 순간적인 고통일 뿐, 죄에 대한 근원적인 반성을 상실한 인간에게는 지극히 비인간적인 가혹 행위 혹은 고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수용소의 병원은 아수라장이다. 병든 죄수들, 죽음에 이르도록 태형과 채찍질을 당한 죄수, 조금이라도 체형의 집행을 늦추기 위해 꾀병 부리는 죄수, 심지어 족쇄가 채워진 채 죽어가는 폐병 환자들과 나란히 같은 병실에 나뒹군다. 그 병실에 든 화자는 죄수들의 신망을 받는 의사들과 감옥의 사령관들과 비교하기도 한다.

죽음의 집에서 마지막 출옥을 앞둔 화자는 거울을 응시하듯 초조하게 자유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의 회한은 감옥에서 몽상하던 자유가 현실에서 주어진 자유보다 훨씬 고급스러운 자유일지 모른다는 상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자유의 순간은 그에게 부활의 순간이나 다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함께! 자유, 새로운 생활, 죽음으로부터의 부활,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순간인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 기억에서 흐려지는 것도 사실이다. 감옥에서의 길고 지루한 날들이, 마치 비 온 후에 지붕에서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한결같이 단조로웠던 일로 기억된다. “나는 결국 참아 냈다. 기다렸다, 하루하루를 세어갔다. 극도로 고독했고, 이 고독조차 사랑하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고독했던 나는 나의 지난 생애를 되돌아보며 엄격하게 자신을 평가해 보았으며 이러한 고독을 나에게 보내 준 운명에 감사했다. 이러한 고독이 없었다면 자신에 대한 반성도 지난 생애에 대한 엄격한 비판도 없었을 것이다.” 화자 고랸치코프의 입을 빌려 저자 도스또예프스키는 내 뱉는 고백이다.

감옥의 갇힌 죄수나 세상에 갇힌 우리가 하나님 관점으로 보실 때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 매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루살이 같다는 생각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의 하루를 살고 밤 되면 깊은 잠으로 하루를 마감한다. 그리고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면 새로운 오늘을 주심에 감사하며 친구 되어 주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루를 또 살아내는 것이다. 아직은 육신의 감옥에 갇혀 사는 내가 주님 오시는 그날, 부활의 그 날이 되면 주님과 함께 주님의 동산에서 얽힘 없는 자유를 산책할 소망을 그려 오늘을 사는 원동력 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죽음의 집의 기록』, 이덕형 역, 열린책들, 2000.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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