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19)

기사승인 [505호] 2021.02.04  14:04:00

공유
default_news_ad2

- 김상준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김상준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논설위원전 성결대 총장, 교수

Ⅰ. 김상준의 생애
 
 정빈은 태극학회의 청을 받아 매주일마다 태극학회 회원 가운데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김상준도 이 모임에 회동(會同)하였는데, 종교적 관심 외에는 별다른 깊은 관계나 활동은 가지지 않았으나, 광무(光武) 10년(1906년) 11월 18일에는 태극학회 총회에 참석하여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위한 의연금(義損金) 25전을 내놓기도 하였다.
 1907년 드디어 유학 수업을 마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로 번역된 찬송가를 가지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2. 무교정 복음전도관과 김상준
  1907년 5월 2일에 귀국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경성(京城) 종로(鐘路) 염곡(鹽谷)에 다 쓰러져 가는 조선 구식 가옥 몇 칸을 세 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5월 30일, 이 날은 한국성결교회가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어떤 교파적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이 땅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한 것은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한 창설자 나까다 쥬지와 카우만 그리고 킬보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특정한 교파의 설립 목적이나 간접 전도 방식을 버리고 직접 복음전도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대 그 명칭을 복음전도관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고 最初에 東洋宣敎會 창립자인 카우만, 킬보른 총리들의 정신은 따로히 敎派를 세운다던지 또는 선교 사업이라는 野心에 잇는 것이 아니라 純然히 구원의 복음을 미신자의게 넓히 전하여야 되겠다는 정신으로 좃차 잇게 된 명칭이였나니라. 그래서 처음에는 오직 전도로만 주장을 삼고 牧會에는 주력지 아니하엿슴으로 교회를 조직하지도 아니하고 따라서 정치도 업섯다.”
 
이들은 복음전도 본위의 정신으로 일본에서 익힌 전도 방식에 따라 단순하고 원색적인 직접 전도 방법을 택하였다. 이명직(李明植) 목사는 이들의 전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전도의 방법은 間接의 方法을 바리고 오직 直接임은 古今이 一般인데, 매우 단순하고도 기발(氣潑)하엿나니 밤에는 로상에서 등을 들고 라팔을 불며 북을 치고 찬미를 부르고 모여드는 사람의게 전도하고 다시 行列을 지어 가지고 전도관으로 도라가서 집회를 하고 낮에는 지난 밤에 결심한 사람을 심방하는 일과 개인 전도하는 일노 구령사업을 하였나니 그때뿐 아니라 지금도 그 전도의 방법은 변함이 없나니라.”
 레티 카우만은 초기의 전도 모습을 다음과 같이 또한 설명하고 있다.
“朝鮮 首府 京城에 傳道館을 設立하기 爲하야 보내시고 開催하는 첫날에 數十名의 靈魂을 救援하심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을 確實히 印을 치섯다. 午後에는 聖別會를 열게 되매 많은 신자들이 모여 聖潔의 恩惠를 求하는 中에 恩惠를 받은 者가 不少하였으며 聖神의 불을 받은 者들은 그 불을 가지고 自己 敎會로 가게 되였다. 다 문어져 가는 貰家를 一年 契約으로 借用하여 集會를 계속하엿는데 集會는 恒常 熱心으로 듣는 聽衆으로써 充滿하엿다.”
 매일 저녁마다 한 사람은 장등(長燈)을 들고, 한 사람은 북을 치며 황토현(黃土峴)에 가서 '믿기만 하오', '믿기만 하오' 하고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은 신자와 일반 불신자간에 부정적인 안목으로 비춰져 만물의 때(dirt)와 같게 생각하거나, 굿중패나 남사당패와 같다는 조롱을 받았다. 그러나 김상준과 정빈은 오히려 감사하고 어떠한 방법이든지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개가죽이라도 무릅쓸 경우에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뜨거운 구령열로 충성되게 순복음(純福音)을 전하였다. 이에 대해 곽재근(郭載根)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朝鮮 敎會 初時代에는 時代가 時代인 만큼 說敎할 때에 半傳道, 半演說體로 卽, 하나님의 말삼도 傳하려니와 國家를 爲하야 民族을 爲하야 雜同散異로 말하여야 說敎를 잘한다고 하고 單純한 眞理로 罪와 義와 審判만을 말하면 異端이라고 別名을 부치는 때 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역에 함께 하셔서 권능을 베푸셨다. 시대적 감각(時代的 感覺)이 없는 전도 방법이라 하나, 천루(賤庵)한 방법을 통해서도 이들의 전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을 경향간(京鄕間)에 더하게 하셨다.
 이들의 전도는 경성(京城) 시내 각교회 교인들에게 호기심을 발동(發動)케 하여 구경삼아 복음전도관에 들어오게 하였다. 구경삼아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김상준의 은혜넘치는 설교를 듣고 모두 감복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1907년경 김상준이 사역한 경성 (현, 서울) 중심지 모습(출처:한국성결교회사)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