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상준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김상준의 생애와 사상
정상운 박사(교회사) 본지논설위원전 성결대 총장, 교수 |
정빈은 태극학회의 청을 받아 매주일마다 태극학회 회원 가운데 기독교를 알기 원하는 유학생들에게 설교하는 시간을 가졌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김상준도 이 모임에 회동(會同)하였는데, 종교적 관심 외에는 별다른 깊은 관계나 활동은 가지지 않았으나, 광무(光武) 10년(1906년) 11월 18일에는 태극학회 총회에 참석하여 『태극학보(太極學報)』를 위한 의연금(義損金) 25전을 내놓기도 하였다.
1907년 드디어 유학 수업을 마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동경성서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어로 번역된 찬송가를 가지고 고국을 향해 떠났다.
1907년 5월 2일에 귀국한 김상준은 정빈과 함께 경성(京城) 종로(鐘路) 염곡(鹽谷)에 다 쓰러져 가는 조선 구식 가옥 몇 칸을 세 내어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전도 활동을 시작하였다. 1907년 5월 30일, 이 날은 한국성결교회가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어떤 교파적 배경 없이 독자적으로 이 땅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한 것은 일본 동경에서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를 설립한 창설자 나까다 쥬지와 카우만 그리고 킬보른의 선교 정신을 이어받아 특정한 교파의 설립 목적이나 간접 전도 방식을 버리고 직접 복음전도 방식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대 그 명칭을 복음전도관이라 함은 다름이 아니고 最初에 東洋宣敎會 창립자인 카우만, 킬보른 총리들의 정신은 따로히 敎派를 세운다던지 또는 선교 사업이라는 野心에 잇는 것이 아니라 純然히 구원의 복음을 미신자의게 넓히 전하여야 되겠다는 정신으로 좃차 잇게 된 명칭이였나니라. 그래서 처음에는 오직 전도로만 주장을 삼고 牧會에는 주력지 아니하엿슴으로 교회를 조직하지도 아니하고 따라서 정치도 업섯다.”
이들은 복음전도 본위의 정신으로 일본에서 익힌 전도 방식에 따라 단순하고 원색적인 직접 전도 방법을 택하였다. 이명직(李明植) 목사는 이들의 전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들의 전도는 경성(京城) 시내 각교회 교인들에게 호기심을 발동(發動)케 하여 구경삼아 복음전도관에 들어오게 하였다. 구경삼아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김상준의 은혜넘치는 설교를 듣고 모두 감복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1907년경 김상준이 사역한 경성 (현, 서울) 중심지 모습(출처:한국성결교회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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