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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중계/코메니우스 심층분석 (32)

기사승인 [482호] 2020.05.21  11: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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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장, 본지 논설위원)
여섯째, 올바른 영성(경건)운동의 필요성에 관한 도전  
  유럽의 교회역사는 기존의 교회(가톨릭)가 성경의 본질을 떠나, 지나치게 제도화되고, 정치화되어 교권 남용의 문제들이 만연할 때, 그리고 기독교 경건(영성)의 참된 본질을 상실하게 될 때, 교회의 개혁 운동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생각하면, 형제연합교회는 15세기에 보헤미아에서 얀 후스가 낳은 교회개혁 운동의 실체였다. 16세기에 루터의 종교개혁도 같은 맥락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17세기 후반 18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경건주의운동은 역시 프로테스탄트교회 자체가 서로 분리하여 경건(신앙)의 본질을 외면한 채, 지식적인 교리를 인류구원 진리의 객관적인 것으로만 고집할 때, 영국에서의 퓨리턴(청교도)과 화란의 라바디와 독일의 스페너와 프랑케와 친첸도르프 등을 통하여 새로운 경건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앙의 체험적인 주관성(죄 고백과 중생)에 근거한 신앙실천의 모습으로 제도화되고 정치화된 교회의 개혁과 삶의 개혁을 목표로 새로운 경건의 도전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17세기 중엽에 일어난 영국의 청교도 경건 운동의 배후에서 주된 역할을 하게 되었고, 18세기에 형제연합교회(모라비아 형제)는 독일의 헤른후트(Herrnhut)의 신앙공동체에서 새로운 경건 운동을 일으킨 주인공들이 되었다. 역시 18세기에 이르러, 감리교의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웨슬레이는 모라비아 형제들에게서 경건의 영향을 새롭게 받아, 영국의 경건 운동과 사회개혁운동을 일으킨 교회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는 그 시대의 신앙 진리의 객관성과 신앙체험의 주관성을 통합한 교육신학자로서, 개인의 경건에 근거하여, 그 당시 17세기 교육(학교)개혁, 정치개혁, 교회개혁을 전제한 완전한 삶의 개혁을 추구하였던 인물이 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지금 21세기, 한국교회는 새로운 경건 운동과 사회적인 삶의 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할 필요성을 직시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한국교회가 지나친 개 교회주의와 개 교파 주의적인 사고에 빠져, 집단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교회의 세속화와 사유화에 빠진 채,  교회의 공동체성과 사회적인 관계에서의 공공성을 상실하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생각하면, 새로운 경건 운동과 신앙실천의 개혁운동은 반드시 일어나야 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점에서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생생한 경건(영성)은 한국교회의 경건(영성)을 새롭게 하는 일에 역사적인 모범이 분명하다고 본다.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정치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조국에서 쫓겨나, 30년 종교전쟁은 끝났지만, 종교자유가 보장되지 않아 망명생활(폴란드 리사, 사로스파탁, 암스테르담 등)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들 후손들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엽까지 “복음의 숨겨진 씨앗들”로 전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18세기에 헤른후트(Herrnhut)의 친첸도르프를 통하여 다시 그들을 역사 가운데로 불러내어, 유럽 경건주의운동의 주된 역할 자들이 되게 하였고, 마침내 세계복음 전도를 위한 선교사 파송역사에 프로테스탄트 최초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였다.
  무엇을 말하는가? 진리에 근거한 올바른 경건(영성)을 준비한 자들을 하나님은 외면하지 않으며, 그들을 그의 나라의 일꾼으로 다시 사용하신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기독교 영성을 소유한 자들이었으며, 어떠한 고난과 박해 가운데서도 그들 영성을 포기하거나 잃어버리지 않았던 고난의 승리자들이었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 역시 마찬가지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 시대에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인물이었다. 11세에 고아가 되어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형제연합교회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아내와 자녀를 두 번이나 잃어버린 비극적인 운명 자이기도 하였다. 유럽에서의 30년 종교전쟁은 자신과 형제연합교회를 더욱 파멸로 내몰았던 비극적인 전쟁이었으며 신앙의 박해였다. 그는 그 당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했는데, 형제연합교회의 해산과 감독 직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었다. 그가 가진 책들의 모든 원고가 불타버렸다. 그 시대에 코메니우스는 그야말로 그가 가진 모든 것(기득권)을 다 잃어버렸다. 역사에서 그의 존재도 사라졌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에서 코메니우스는 학교의 교사였으며, 학교 교육을 개선하려는 교재집필자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가 형제연합교회의 목사요, 신학자였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생각하면, 코메니우스의 생애는 참으로 비참하고 저주받은 욥과 같은 인생이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그의 확고한 경건(영성)은 그 시대의 모든 고난을 이기는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코메니우스는 그 시대에 모든 것을 잃었으나, 하나님은 350년이 지난 오늘날 유럽에서, 잃어버린 그의 모든 것(명예)을 회복시켜 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욥과 같은 영성을 다시 경험하고 확인하게 된다. 오늘날 세속화의 물결에 빠져, 영원한 것(목표)이 아닌, 수단에만 지나치게 목숨을 걸며, 하나님을 향한 경건에서 흔들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우리 자신들에게 욥의 영성을 소유한 형제연합교회와 코메니우스는 지금 우리의 연약한 경건(영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영적 도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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