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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 ‘하나님 나라’ 입국 절차로서의 세례와 성찬(6)

기사승인 [214호] 2024.05.23  0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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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로스 교리교육 강론 미스타고지 중심

김선영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Ⅳ. 하나님 나라와 세례 및 성찬

1. 하나님 나라

바울에 의하면 이 세상은 사라지고 해체되지만, 우리는 다가올 영원한 세상을 기대하기에 그 나라에 맞춰 살아야 한다. 이처럼 세례와 성찬은 지금, 여기서 상징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을 경험케 하고, 그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강화한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소망하는 것은 그 종말론적 나라의 관점에서 현재의 삶을 조명하며 끊임없이 그 나라에 맞춰 개선하게 한다. 이처럼 세례와 성찬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서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행하는 의식이기에, “주님이 하늘로부터 와서 미래 삶을 드러내고 우리 모두의 부활을 성취할 때” 우리 몸은 불멸하고 영혼은 불변하게 될 것이며, “성례와 상징의 사용은 필연적으로 중단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현실 속에 있을 것이기에 장차 일어날 일들을 상기시키는 가시적 표시는 더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2. 하나님 나라와 세례 및 성찬

하나님 나라와 성례의 관계에서 테오도로스가 특히 부각하는 두 용어는 “탄생”과 “음식”이다. “탄생”은 존재의 시작을, “음식”은 존재의 유지를 뜻한다. “우리는 탄생에서 존재를 얻고, 우리 자신을 먹임으로써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두 가지 행위, 즉 탄생과 음식에 의해 존재”하는 것과 같이 “다음 세상에서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우리는 부활로 태어남으로써 존재를 얻을 것이며,” “성령의 은혜에 의해” 먹여질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실제로 경험할 것을 상징적으로 행하는 세례는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이요 성찬은 그 존재를 유지하는 “음식”이다.

1) 하나님 나라와 세례

그리스도가 하늘에 세운 왕국은 불멸과 불변의 차원에 속한다. 따라서 본성적으로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그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가망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테오도로스는 입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첫 번째 탄생 대신 또 다른 탄생”이 있음을 강조한다. 이에 대해 주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고 명언했다. 여기서 테오도로스는 주님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알려준다고 설명한다.

첫째 방법은 부활 때 실제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둘째 방법은 세례를 통해 상징적으로 다시 탄생하는 것이다. 주님은 니고데모가 첫째 방법은 이해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둘째 방법만 밝혔다고 말하면서, 테오도로스는 “믿는 자들은 모두 그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세례의 상징들에 의해 그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현실의 행복으로 옮겨지도록 말이다.

이처럼 세례는 “두 번째 탄생”을 상징적으로 행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자연인으로 한 번 태어났고, 부활과 함께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때 우리는 “현재의 탄생에서 미래의 탄생으로 이동”할 것이다. 그 미래의 탄생을 고대하며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고, 필멸의 본성을 벗고 상징적으로 새로 탄생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이요 하나님 나라의 상속인이 된다. 이렇게 “세례에 의해 매장의식을 완료”하고, “물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해 부활의 표시”를 받고, 다시 태어나 새사람이 된 자는 이제 아담이 아닌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가 된다. 아담은 필멸하고 쉽게 변하며, 죄로 인해 버거운 짐을 지고 비참한 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리스도는 부활 이전에도 죄가 없었고, 부활과 함께 불변하는 본성을 완전히 받았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는 우리도 부활하고 부패하지 않게 될 것임을 확증했다. 또한 우리를 “폭군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했다. 테오도로스는 이 “두 번째 탄생”을 “두 번째 창조”라고도 부르면서 이것은 “첫 번째 창조보다 더 고귀”하다고 표현한다. 이 “두 번째 탄생”은 테오도로스가 세례의 목적이라 말한 “양자됨”의 사건이기도 하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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