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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 <33>

기사승인 [611호] 2024.04.11  23: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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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조와 부활

이재정 목사(복된교회)

봄비 자주 내립니다. 과수농가 피해를 염려하지만, 그래도 비 오다 갠 하늘의 청명함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깊은 마음으로 듭니다.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그 맑은 하늘에 듬성듬성 솜사탕 같은 구름이 노닐면 아예 경이롭습니다. 시인 묵객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아름다움을 “자연”이라고 쉬 말합니다. “스스로 그리된 사물”이라는 뜻이겠지요. 나는 스스로 그리된 게 아니라 나를 만드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그 하늘과 그 구름도 만드셔서 계절마다 다른 감흥을 누리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틀림없고 말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그 하늘 그 구름이 주는 감흥이 이리도 속 깊을까요. 맑은 하늘은 고결하신 하나님의 음성으로 ‘너도 좀 맑아라.’ 그리 말씀하시는 손짓이십니다. 부드러운 뭉게구름은 ‘사람 향한 네 마음이 이리 둥글고 부드러워라.’라는 수신호로 보입니다. 왜 있잖아요.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그 뜻을 더 잘 전하시려고 손짓을 섞어 말씀하시는 모양요. 구름이 바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손짓으로 보입니다. 시인의 감성을 넉넉히 넘어, 영혼의 메시지가 들어있지 않아요?. 일테면 하늘 가득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치는 날을 가정해 보셔요. 신비한 두려움 같은 거 들었잖아요! 그 사이로 언뜻 햇살이 비치는 날 구름 속 역광이 비치는 광경은 예수님 다시 오실 날을 가정하게도 합니다. 엄숙해져요. 손양원 목사님이시지요?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고개 들고 멀리 멀리 바라보는 맘”이라고 그 먹장구름을 예수님 재림으로 형상화하신 분이.

하늘 말고 땅에는 맑은 시내가 흘러 바다로 듭니다. 이즈음 만경강 강가에 갯버들 피는 경치나 섬진강 수역의 산수유, 진달래, 개나리, 매화, 마침내 함성처럼 쏟아내는 벚꽃 경치는 가히 금수강산이라는 이름을 빛내는 기세입니다. 그리 흘러드는 물길을 받아 안은 바다가 여전히 푸르게 아름다운 모양도 장엄하여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연한 자연 현상을 넘어서는 영혼의 소리가 들었습니다. 영혼의 시인 ‘박남석’은 “꽃 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가만히 기울이고 들어 보세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냇가에서 종종종 우는 새소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 보세요/ 너희들도 이 물처럼 맘이 맑아라.”는 노래를 지어 그 메시지를 읽어냈습니다.

인류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17세기부터 수증기와 구름, 그 구름이 다시 비로 내려 시내와 바다를 이루는 자연 현상을 깊이 관찰했습니다. 그 후로도 땅의 물이 수증기로 올라 하늘의 구름과 비로 변하는 과정을 완벽히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적어도 19~20세기 초반에 와서야 대기 과학이 정립된 것으로 봅니다. 구름과 시내의 숨겨 가진 모종의 관계가 밝혀진 게 겨우 몇백 년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밝혀낸 과학적 관찰의 결과로 구름과 시냇물이 ‘동일 본질’이라는 사실을 정의 했습니다. 지금은 누구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창조하신 사연은 하늘에 뜬 구름처럼 아름다운 정감과 신비한 메시지를 주기는 하지만 몸으로, 혹은 이성적으로는 체감되지는 않지요. 본질이 같은 물로 된 그 구름이 사람에게 체감되는 건 의외로 비로 내린 시냇물입니다. 사람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사실이 실제인 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체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하늘에 뜬 구름 같습니다. 세상을 몸으로, 이성적 지식으로 살아내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여러 과학적 근거들은 세상의 생물들이 진화를 이루었다는 근거들을 제법 다양하게 제시합니다. 하늘 구름이 비로 내려 이룬 시냇물을 만져 보는 것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적 체감이지요. 창조와 진화, 그 둘 사이에 그간 모르고 지냈던 비밀이 있을 겁니다. 구름과 시내가 여러 천 년 동안 우리 몰래 관계있었던 것처럼요. 창조와 진화 사이에 우리가 아직 모르는 비밀이 있을걸요. 죽자 살자 그거 밝혀내 보는 것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과업이겠지요. 그러나 있는 대로 보고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또 다른 간극, 죽음과 부활 사이에도 우리가 체감할 수 없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가 숨겨져 있는 거지요. 그 내막 들여다보느라 좋은 세월 허비하기보다는 그 풍성한 부활 생명을 누리는 인생으로 살아내는 게 훨씬 나아요. 그렇구 말구요.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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