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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177>

기사승인 [611호] 2024.04.11  23: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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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소하기 사소한 생이여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몇 년 전 기억인데도 선명하다. 아주 늦은 밤의 문상이었는데 소천하신 분 영정이 참으로 젊고 아름다웠다. 햇 육십이라고 들었는데 사진은 사십대 초반쯤, 여자 가장 아름다울 때가 삼십 대 후반에서 사십대 초반이 아닐까, 화려한 색깔의 자켓은 생뚱맞을 정도로 선명했고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 영정이 꼭 낡고 희끄무레해야 할 이유야 없겠지만 그 생경함이 생과 사에 대한 기이한 관계를 유별스럽게 보여주는 듯하여 기억에 있다.

이청준은 장례식에서 일어난 일을 적으며 축제라 명명한다. 인간사 모든 일이 그렇듯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일은 없다. 수많은 실낱이 얽히고설켜 도무지 가닥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소설 속 화자는 이런 이야길 한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사람을 잃는 것은 '세월에 대한 증인을 잃은 것'이며, 증인이 없는 그 세월만큼 남은 자 역시 '자기 삶의 역사를 잃은 것'이다.” 적확한 말이다.

장례라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치르는 일, 삶이라는 휘장이 걷힌 죽음 앞에 서면 사람들은 어느 때보다 예민하고 날카롭다. 숨겨져 있던 가시가 고개를 들고 상처로 인한 고함이 터져 나오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哭이랄지 곡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곡소리는 주위를 덮고 슬픔을 불러낸다. 슬픔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자신만의 포한抱恨을 촉발해내니 결국 장례를 덮기 위해 영리한 선비님들은 곡비를 불러왔던 것일까.

장례식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곡비가 사라진 것처럼 슬픔도 사라져 버렸다. 혹여 슬픔, 덩어리 되어 여기저기 떠다니고 세상을 떠난 그 사람을 말할 수 없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 슬픔 덩어리 속에 갇혀 있다 하더라도 손님에게 대접해야 할 음식, 음료수, 혹은 커피 부탁, 다리 저림, 타인의 옷차림과 묵념하는 태도, 시들은 국화, 피어나는 향의 냄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앞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하는 사람이 빠진 자신의 삶은 또 어떤가.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아주 쉽게 슬픔의 막을 찢어내고 대신 자리한다는 것,

무참한 모습으로 목련이 져가고 있다. 피어나는 목련꽃을 보며 설렘 속에 바라보았는데……. 오 아름다운 하얀 등롱이여, 그 하얀 등롱은 보이지 않는 곳, 마음속 어둡고 습기찬 곳까지 소쇄 시켜주는 것 같았는데……. 아래를 보니 거뭇한 아린이 무수히 떨어져 있었다. 꽃에 홀려선가 아린을 본 기억이 별로 없었다. 겨울 그 추울 때 단단하고 여무진 모습으로 꽃을 꼭 감싸고 있다가 꽃이 피어나니 훨훨 져내린 것이다. 아린은 단단한 피부에 마치 무슨 동물이라도 되듯 잔털을 가득 매달고 있었다.

어젠 요양원에 가서 휠체어를 타신 99살 엄마와 작은 공원을 거닐었다. 엄마는 나의 진정한 아린 아니신가. 몸은 말할 수 없이 작아지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으시다. “아야, 하나님이 제발 나 좀 데려갔으믄 좋겄다.” “생사화복이 우리 맘대로 되지 않으니 엄마 그런 생각하지 마셔.” “그라긴 그라제, 그래야제, 아야 근디 저것이 꽃이냐?” 엄마가 꽃이냐고 묻는 나무는 세열 단풍나무였다. 이 환한 봄날에도 아직 작년의 불그레한 나뭇잎을 매달고 있어서 누추해 보이는 나무, 그런데 엄마 눈에 꽃처럼 보인 것이다. 하나님 보실 때 혹시 늙은 울엄마 허순덕 권사님도 꽃처럼 보고 계시지 않을까?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성경이 기록한 것은 단순히 슬픈 자 위로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장례라는 축제 속에서 너를, 네 미래를 보라는 이야기다. 생각해야 하리, 아니, 볼 수 있어야 하리. 얼마 후면 분명히 치러질 내 장례식을, 설령 누군가, 내 딸일까?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여기며 적막한 슬픔에 젖는다 한들, 떠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것, 죽음이 지닌 그 무시무시한 홀로를, 고독을. 산 자여 유심하라는 것.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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