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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173)

기사승인 [607호] 2024.02.28  18:5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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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르페 디엠 메멘토 모리

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요즈음 눈에 띈 기사는 노르웨이 총리를 지낸 93살 부부의 동반 안락사다. 부부의 안락사는 의료진이 직접 약물을 투여했다고 한다. 평생 내 연인이라고 아내를 불렀다고 하니 정겹기도 하다. 죽기 전 침대에 누워 서로에게 보낸 마지막 인사는 뭐였을까?

여든세 살의 철학자가 여든두 살의 아내에게 바친 글 <D에게 보내는 편지>도 있다. “당신은 곧 여든두 살이 됩니다. 함께 살아온 지 쉰여덟 해가 되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평생 글을 써 왔지만, 아내에 대한 글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 글을 썼다는 철학자 앙드레 고르가 아내 도린을 향하여 쓴 글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더는 함께할 수 없을 시간에 이르러 동반 자살했다. 안락사와 자살은 좀 방향이 다르지만 프랑스와즈 사강도 ‘자기 자신을 해칠 수 있는 권리(자살)가 있다는 말’로 철없는 젊음을 매혹하던 시절도 있었다.

네덜란드는 2002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다. 2022년 전체 사망자의 5%가 안락사로 숨졌다고 한다. 안락사는 존엄사의 다른 명칭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생명의 존엄성보다 삶의 존엄성을 우위로, 즉 삶의 마무리를 존엄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의식이 사람을 존엄하게 만든다는 방증 같기도 하다.

<플랜 75>는 일본 영화다. 일본은 20여 년 전부터 75세를 후기 고령자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감독은 그래서 75살 나이를 주목 제목으로 삼았다고, 75살이 되면 원하는 사람에게 나라가 편안한? 죽음을 줄 수 있다는, 미래에 대한 상상이 가미 된, 일종의 sf 영화라고 할까, 놀라운 것은 그 영화가 뿜어내는 리얼리티에 있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 어디선가 이루어지고 있는 일처럼 여겨진다.

장애인 시설에 근무했던 직원이 장애인 19명을 사살한 일본 열도를 놀라게 한 팩트에 기인한 영화, “넘쳐 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노인들을 무차별 살해한 젊은 남성은 자살하며 유언을 남긴다. 이런 노인 혐오 범죄에 응답하듯 일본 국회는 ‘75세 이상 고령자가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안락사 제도 ‘플랜(Plan) 75’를 통과시킨다. 고독사도 나온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친구, 전화해도 안 받으니 주인공이 찾아간다. 열려있는 문과 냄새. 그리고 식탁 위에 엎어진 사람, 그런 고독사는 참혹하다. 그래서 TV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되는 플랜 75의 광고 문구는 그럴듯하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지만 죽음만큼은 원하는 때 할 수 있는, 의지를 최대한 보장하는 선택이란 것이다. 영화는 에둘러 표현하거나 감싸는 것도 없이 직진한다. 그저 노년과 그들 앞에 선 죽음으로, 감독은 카메라 앵글의 흐릿함으로 세상이 해피엔딩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했다고 했다. 코로나 시절에 인공호흡기를 늙은이들은 젊은이를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기사가 있었다. 유럽의 어느 나라에서는 코로나로 파생된 늙은이들의 죽음으로 복지 예산이 줄어서 기뻐한다는 소문도 들었다. 결국 <플랜 75>는 일종의 나치 행태이다. 그 대상이 유대인에서 가난하고 외로운 노인들로 바뀌었을 뿐, 존엄을 이야기하지만, 존엄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처리>다. <자연>이나 <신>이 배제된 인간의 계획이란 것이 그렇다. 거의 모든 일이 그렇다,

사실 삶이란 게 어디 그리 만만한가. 사람의 기쁨과 즐거움, 충만함이 있지만 그들의 힘은 약하다. 고통이야 삶이라는 숲에서 만나는 흔한 나무 아닌가. 외로움은 질기고 쓸쓸함 역시 다정한 친구처럼 항시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가끔 꿈같은 시간도 흐르지만 꿈처럼 스쳐 지나가고, 죽음은 빤히 보이는 개울가 건너편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가, 고향처럼 본향이 기다리고 있는 삶을 살아서, “아무리 높은 파도라도 결국 수평으로 되돌아가듯이 본 적은 없으나 되돌아갈 곳은 있다고” 이어령 선생이 마지막 수업에서 말했다. 어쩌면 영화를 보는 것은 카르페디엠이다. 보고 난 후 생각하는 것은 메멘토 모리다. 나는 카르페 디엠도 좋아하지만 결국은 메멘토 모리族이다. 내 삶에서 연명치료는 없다고 애들한테 말해놓았지만 적어도 내 생명은 그분이 알맞을 때 자연스럽게 거두어 주시길 바란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바쇼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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