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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서종표 목사 – 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31)

기사승인 [593호] 2023.09.21  22: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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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헤미야 같은 목사님

김용은 목사

김용은 목사님은 6·25로 인하여 가족과 친척 스물세 명을 잃는 아픔을 당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하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느헤미야와 같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일을 보면 쉬지 않고 밤을 세워가며 일을 하시는 열정적인 분입니다.

목사님은 느혜미야처럼 불굴의 신념을 가진 지도자요 애국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결심하면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심지가 견고한 느헤미야 같은 분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일한 저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목사님은 26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된 후 지금까지 교단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해 총회는 일곱 번이나 재투표를 할 만큼 당시 보수와 진보의 갈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증경 총회장들의 중재로 총회장으로 피선이 되었습니다. 그것도 단번에 3분의 2를 득표하여 당선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김용은 목사님을 총회장으로 예비하시고 뽑으신 것입니다.

임용희 장로(증경부총회장, 은평교회 원로)

총회장이 되시자 제일 먼저 증경 총회장을 총회장 자문위원으로 모셨습니다. 교단 지도자들이 협력하면 교단은 분열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단은 정치적으로 안정이 되었습니다. 둘째, 교단의 재정자립을 위해 전국 교회를 순회하며 지교회들로 하여금 총회를 위해 협력을 받아 재정을 안정시키셨습니다. 예성과 기성이 분열하기 2년 전, N.C.C 탈퇴안을 14회기에 목사님의 이름으로 내셨습니다.

그러나 탈퇴안이 보류되자 몇몇 분들이 교단을 분리해서 예성교단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당연히 예성을 가야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기성이 복음주의적 교단이며 자유주의 교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과 성결교 뿌리인 O.M.S가 N.C.C 가입을 원치 않고, 많은 지도자들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어도 교단이 분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성과의 합동을 위해 힘쓰셨습니다. 목사님이 합동을 위해 힘쓰시는 것을 본 김종호 장로님과 박희순 장로님이 재정 뒷받침을 하여 2차 합동(1973년)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일에 앞서가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셨습니다. 총회장 자문기구와 연중행사표가 목사님의 재임 중에 만들어져서 30년이 넘는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모든 일을 희생적으로 하셨습니다. 은퇴 후 받은 은퇴비를 두암 순교기념교회와 군산 기독교센터를 짓는 데 헌금을 했습니다.

의정사(議政史) 발간은 교단이 해야 할 일이나 하지 못하고 있을 때입니다. 목사님은 이 사실을 아시고 처음에는 300만원이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시작했으나 일이 확대되어 2천 5백만 원을 지출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전액 부담하여 발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국교회에 기증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수도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특히 무주택, 무통장, 무토지, 무패물 4무정신입니다. 수도자의 청빈, 순결, 순명의 길을 빛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셨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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