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프리랜서 작가의 작품분석 / 작가 김현희

기사승인 [606호] 2024.02.22  09:01:55

공유
default_news_ad2

- 도스토예프스키 중기소설 ‘상처받은 사람들’을 읽고

1860년 봄에 ‘멸시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집필을 시작한 작품. ‘상처받은 사람들’로 1861년 1월~7월까지 연재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화자로 등장하는 무명 작가인 이반도 몸이 약하고 아파서 염려하는 내용이 있듯이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병으로 연재를 중단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러시아 하층민들의 괴로운 삶과 이들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이기주의적인 상류층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작품을 통하여 이 사람들 사이에 비극적인 모순과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 줍니다. 이반뻬뜨로비치-나따샤-알료사 이들의 삼각관계의 심리묘사와 가련한 소녀 넬리와 비정한 인물 발꼬프스끼 공작을 만나게 됩니다.

무명 작가로 등장하는 이반 뻬뜨로비치의 1년의 삶 속에 1840년~1850년 대의 문학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이 함께 압축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이흐메네프 일가의 이야기와 스미트 일가의 비극적인, 본질적으로는 넬리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교차되어 나옵니다.

발꼬프스끼 공작은 스미트의 딸, 넬리의 엄마를 기만하여 그녀 아버지의 재산을 가로챈 다음 그녀를 버렸고, 자신의 딸인 넬리도 찾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 알료샤는 이흐메네프 노인의 딸 나따샤로 하여금 집을 떠나게 만들지만, 결국 돈 많은 다른 여인을 좇아가며 말로만 사랑한다고 나따샤의 맘에 비수를 던집니다.

스미트는 아버지를 떠나 연인을 따라 간 딸을 저주하고 그녀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모든 재산을 사기당한 부녀는 극심한 가난과 궁핍한 삶 속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들의 혈육인 넬리도 엄마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는 과정에서 이반 뻬뜨로비치를 만난 후 따뜻한 사랑 속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전까지는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흐메네프도 자신의 딸을 저주하지만, 마음속으로 이미 딸을 용서하고 있으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아닌 척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넬리에게서 스미트의 불행한 딸인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를 들은 후에 고집을 꺾고 나따샤를 용서하고 화해합니다.

화자인 이반 뻬뜨로비치는 직업이 작가이기에 자신과 주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자연스럽게 기록하듯이 벌어지는 사건을 유도합니다. 그는 타인의 삶과 운명에 개입하면서 박애주의자와 인본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지는 듯합니다.

그러나, 넬리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와 나따샤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진행해 나가지만 이반 뻬뜨로비치의 문학과 삶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따샤와 넬리를 돌보느라 창작 작업에 집중하지 못하고,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편집작업을 합니다.

이 작품에는 너무 많은 우연이 존재합니다.

나따샤가 알료샤와 동거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과 알료샤가 나따샤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며 그녀를 완전히 떠나는 것입니다. 더구나, 나따샤는 그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반 뻬뜨로비치의 집에서 그가 나가고 넬리 홀로 남아 있을 때 발꼬프스끼 공작이 방문한 대목은 넬리가 자신의 아버지를 알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녀는 ‘그가 와 있어요’하고 부르짖는다” 그리고 그녀가 아버지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이반 뻬뜨로비치는 단순한 관찰자의 입장만을 취합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모순되는 특징들이 등장합니다. 넬리는 증오로 뭉친 존재입니다. 결국 그 증오가 자기 자신을 파괴합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갈망하지만, 사람들에게 냉정합니다. 알료샤는 순진하고 단순한 어린아이이면서 나약한 에고이스트입니다. 이흐메네프는 아내와 딸을 사랑하면서도 그들에 대해 박정합니다.

발꼬프스끼 공작은 비극의 씨앗을 심어 놓은 인물이며, 성공을 위하여 무엇이든 쟁취하는 이기주의적인 사기꾼입니다.

넬리는 이 작품에서 창조된 인물 중 가장 큰 의미를 가진 인물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에서 넬리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행위로 마치 누군가를 놀라게 하거나 경악시키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욕을 당했고, 그녀의 상처는 아물 길이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의로 이 비밀스러운 행동을 통해, 우리 모두에 대한 불신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자극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그 고통의 이기주의를 즐기는 듯했다."

이것은 모욕당하고 경멸당한 많은 사람들의 운명에 의해 억눌리고 운명의 부당함을 인식한 뭇사람들의 향락이었다. (pp. 481~ 482)

넬리의 죽음으로 ‘상처받은 사람들’은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넬리의 죽음은 외롭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역할을 해냈고 사랑하는 이들의 사랑과 축복 속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악의 최고봉으로 등장한 발꼬프스끼 공작은 모든 것을 가졌고 부요한 사람, 부러울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딸의 존재도 알지 못했고 그 딸에게조차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이 상처받은 사람들이고 유형지에서 있는 동안 너무나 많은 아픔을 당한 멸시당하고 모욕당한 사람들을 보아 왔기에 원제를 그렇게 정하고 쓴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주위에도 수많은 상처받은 사람들을 쉽게 봅니다. 나의 엄마도, 아빠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나도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상처를 주고, 서로 상처받습니다. 그렇다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의 주인공들처럼 정신병원으로 향하거나, 죽음을 선택하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고, 그 사랑과 은혜 덕분에 상처를 치유하고 위기를 잘 넘겼을 뿐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시대의 인권유린과 특별히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부조리를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최첨단의 시대를 살면서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지극히 평범하고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좌절하지 말고, 더 이상 상처받지 말고 사랑과 은혜의 자리에 나와서 예수님을 만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상처받은사람들』 옮긴이 윤우섭, 도서출판 열린책들, 2011.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