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마 길보른과 전후 한국교회의 재건”
박명수 박사(서울신대학교 명예교수) |
Ⅰ. 엘마 길보른과 선교의 준비
2. 엘마 길보른의 유년시절
사실 하젤 길보른은 설교에 은사가 있어서 순회설교를 하였고, 동시에 동양선교회의 선교잡지의 여성란이 책임자로서 많은 글을 써야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녀를 양육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못했다. 엘마 길보른은 어렸을 때 자신들은 부모로부터 종종 체벌을 받았는데, 그런 경우에는 자신들이 무엇 때문에 벌을 받는지를 알게 하고, 체벌을 받은 다음에는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했다. 이런 기도가 선교사의 자녀들을 바로잡게 했다.
안식교 학교에서 초등교육을 마친 다음에 엘마와 그의 쌍둥이 형제는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였다. 그의 형 에드윈은 미국에 있는 유명한 사립고등학교에 보냈지만 이곳에서 에드윈은 미국의 세속적인 문화에 빠지게 되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버드 길보른은 아들들을 보다 신앙적인 분위기에서 키우려고 했다. 그래서 엘마 쌍둥이를 미국으로 보내지 않고 한국 서울로 보내서 서울외국인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이곳은 주로 선교사의 자녀들이 다니고 있었다. 길보른의 쌍둥이 자녀는 서울에 있는 동양선교회 선교사 사택에 머물면서 통학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헤인스 부부와 독신 처녀 선교사 테이트와 블랙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길보른 자녀들을 보살펴 주었다.
엘마 길보른이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중일전쟁 기간이었다. 아직 본격적으로 미국과 전쟁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아시아의 지배권을 놓고 이미 서구 제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 와 있는 모든 외국인을 감시하고 있었고, 이것은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길보른 형제는 항상 두 명의 일본인들에 의해서 감시를 받았고, 길보른 형제가 서울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안내의 역할도 해 주기도 하였다. 이들은 길보른 형제로부터 영어를 배우려고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일본은 1941년 미국과의 전쟁을 시작한 다음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한국인들도 스파이로 간주로 박해하였다.
길보른 형제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들은 상하이에 있는 동양선교회 본부와 한국선교부 사이의 연락임무도 감당하였다. 길보른 형제는 일 년에 세 번, 부활절, 여름방학 그리고 크리스마스에 상하이의 집으로 왔는데, 이때마다 중요한 문서를 운반하였다. 매우 흥미로운 것은 당시 상하이의 환율은 서울의 환율보다 2배가 되었다. 선교부에 들어오는 선교비를 일본 엔화로 바꾸어야 하는데, 서울보다 상하이에서 바꾸는 것이 배의 수입을 가져오기 때문에 동양선교회는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여기에 대한 분명한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물론 일본은 이런 일을 불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환차익이 너무나 커서 유혹을 이길 수가 없었다. 당시 동양선교회는 선교비의 부족으로 고난을 받고 있었다. 엘마는 만일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이 40,000불의 달러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들은 황해바다 어디엔가 시체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버드 길보른은 한국에 자주 방문하였다. 비록 버드 길보른이 중국으로 갔지만 버드 길보른은 동양선교회 부총리의 자격으로 한국 사역을 감독하였다. 1930년대 버드 길보른은 적어도 매해 총회를 맞이하여 한국을 방문했고, 이때 동양선교회는 중요한 결정을 하였다. 특별히 1936년 분열 이후에는 더욱 동양선교회의 감독권을 강화했으며, 따라서 길보른은 한국에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드디어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동양선교회는 본부를 상하이에서 서울로 옮겼다. 1939년 여름 동양선교회의 최고 결정기관인 총무부 회의를 한국에서 열게 되었다. 이때 장소가 바로 원산 근교의 선교사 휴양지 화진포였다. 이 모임에서 동양선교회는 선교의 범위를 아시아를 넘어서 인도로 확대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모임은 여름휴가를 겸한 것이었다. 선교사들은 이때 심각한 회의를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선교사의 자녀들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다. 엘마 길보른은 1939년 서울외국인학교를 졸업하였다.
3. 길보른의 대학교육 및 선교사 준비
동양선교회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성서학원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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