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위 영 사모의 편지(186)

기사승인 [620호] 2024.08.15  09:47:34

공유
default_news_ad2

- 서늘한 영화

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祖國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러시아 시인 네크라소프의 시. 나는 祖國을 삶으로 바꿔 읽는다. 그 시절에는 조국이 삶의 전부였지만 지금은 지극히 개인적인 삶이 추앙받으며 그럼에도 세계는 하나라는 연결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삶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문학이 고독과 절망 속에서 태어나듯이, 고독과 절망이 어느 부분 진실한 삶의 근본이듯이, 슬픔과 노여움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며칠 전 손주 아이가 열이 났다. 병원에 가니 수족구라고 했다. 아이가 아픈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죽고 사는 일도 아닌데 얼마나 고통스럽던지, 그런데 어떤 심보를 가진 사람들은 아이들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포탄을 던질 수 있는가, 그런 사람들도 자식에게는 자애로운 미소를 보이며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겠지. 한나 아렌트는 그 지점을 포착하여 ‘악의 평범성’이란 세기의 문장을 창조해냈다.

악이 지닌 그 놀라운 평범성을 새로운 시선으로 담은 영화가 있다. 조나단 글레이즈 감독의 ‘존오브 인터레스트’ 홀로코스트 영화지만 홀로코스트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크고 높은 담이 둘러 있을 뿐이다. 담 이편에서는 독일군 장교의 평범한 가정사가 펼쳐진다. 사랑스러운 주부는 꿈에 그리던 정원을 가꾸며 살아간다. 아이에게 꽃을 보여주며 꽃 이름을 이야기해주는 엄마. 클로즈업되는 꽃!(도 기괴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의 금이 들어있는 이빨이 장난감이 될 수 있고 그들이 죽기 전 벗어 놓은 옷이 나의 옷이 되고 선심 쓰듯 나누어주는 옷이 된다. 옷 주머니에서 나온 립스틱을 바르는 여인, 아이들은 활기차게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해가고 있으며 그들만의 아름다운 강가에서 피크닉을 즐긴다. 뼛가루를 거름처럼 숲 여기저기 뿌리는 장면들은 장교 아내가 가꾼 아름다운 정원이 연상되어 소름이 돋는다.

그런 그들과는 아주 상이한 존재가 열화상 카메라에 잡힌다. 굶주린 이들 먹으라고 사과를 여기저기 넣는 모습. 소녀의 이름은 알렉산더. 홀로코스트 시절의 실제 인물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는 이미 90세의 할머니가 되어 있었지만, 감독은 메이킹 필름 3에서 말한다. 어둠 속에서 선함을 보여준 축복과도 같은 존재라고,

실제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박물관과도 아주 가까운, 아우슈비츠의 반경 20-25KM에서 진행되었다고 한다. 스텝들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카메라는 숨겨두고 배우들만 실제로 생활처럼? 연기했다고 한다. 영화 속 음악이 경이롭다. ‘폭력 없는 보는 영화 폭력을 드러내는 듣는 영화’

우리가 날마다 내보내는 쓰레기들의 존재를 생각해보자. 단지 격리되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래서 매우 위생적인 삶을 살아가는 듯 여기지만 실제는 그 어딘가에 내가 내보낸 쓰레기들은 여실하게 존재한다. 감독은 말하고 싶었을까?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것들을, 아니 보이지 않아서 더욱 잔혹한 이야기를, 더불어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힘을 생각하게도 한다. “하나님 보여주면 믿을게” 주님을 모르는 자들의 그 우매한 논리. 보이지 않는 곳은 마치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보이지 않으므로 더욱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영화.

그러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보이는 것에 혹은 보여주는 것에 인생을 걸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즐거움과 기쁨을 향하는 가벼운 부나비 아닌가, 오스카 수상에서 조나단 글레이저는 말한다. “그들이 그때 무슨 짓을 했는지 봐”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봐” 사실 영화를 보는 동안 내내 움찔거렸다. 보는 동안에도, 보고 나서는 더욱 서늘해지는 영화다. 어쩌면 감독은 악의 펑범성을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우리 앞에 펼치며 당신은 어때? 묻는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삶을 성찰하지 않는 자는 살 가치가 없는 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의 존(zone)은 어디인가?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