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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 박명수 박사의 엘마 길보른 (6)

기사승인 [627호] 2024.10.31  04:0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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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마 길보른과 전후 한국교회의 재건”

박명수 박사(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Ⅰ. 엘마 길보른과 선교의 준비

 

3. 길보른의 대학교육 및 선교사 준비

엘마 길보른은 자신의 성결 체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그는 자신의 선교사로서의 헌신을 언급하고 있다.

길보른 자녀들이 애즈베리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아시아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였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한국에 있는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1940년 말 철수하였지만,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동양선교회 선교사들은 포로가 되었다. 버드 길보른도 마찬가지였다. 버드 길보른 부부는 상하이 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3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리고 이들이 석방된 것은 1943년이었다. 따라서 길보른 자녀들은 이 당시에 부모의 생사를 잘 알지 못했고 뿐만 아니라 부모로부터 아무런 재정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

길보른 부부는 감옥에 있는 동안 자녀들을 위해서 매일 기도했고, 그 결과 그들이 자녀들을 보살필 수 있을 때 보다 더 놀라운 결과를 얻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자녀들은 다 같이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한 것이다. 원래 길보른 자녀들은 부모의 선교사역에 대해서 반항적인 성향을 갖고 오히려 세속적인 출세를 꿈꿔왔는데, 놀랍게도 부모가 감옥에 있을 때 이들은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그 한 예를 엘마에게서 찾아보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부모가 포로로 있는 동안에 이 세 형제가 다 결혼했다는 것이다. 엘마의 경우를 보면 당시 엘마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름에 캠프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때 형 에드윈의 소개로 미시간 주립여자대학에서 교육학을 공부한 엘라 루쓰(Ella Ruth)라는 이름의 남부출신의 매력적인 여성과 사귀게 되었다. 이들은 1943년 6월 애즈베리 캠퍼스에서 결혼하게 되었고, 평생 동지가 되었다. 비록 아버지는 선교사 후보생에게 딸을 주는 것을 싫어했지만 열렬한 감리교도인 어머니는 찬성하였다. 엘라는 공부에 있어서 엘마 길보른을 능가했고, 엘마가 대학을 졸업하고 애즈베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이들은 함께 수업을 들었고 엘라는 엘마의 공부를 도왔다. 후에 엘마가 한국에 선교사로 왔을 때 엘라는 서울신대에서 기독교교육과 그리스어를 가르쳤다. 엘마 길보른은 애즈베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이어서 켄터키주립대학원에서 MBA를 공부했다. 이것은 그가 앞으로 선교사역을 하는데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대학원에서 MBA를 마치자, 엘마는 곧 바로 중국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아버지 버드 길보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버드 길보른은 석방된 다음에 LA에 있는 동양선교회 본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버드 길보른은 엘마에게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현장실습을 요구했다. 엘마는 자기 부인의 고향인 미시시피 섬머롤(Sumerall) 근처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목회실습을 했다, 이 교회는 토마스 카루스(Thomas Carruth)가 담임하는 교회로서 동양선교회를 잘 알고, 또한 애즈베리에서 좋아하는 강사이기도 했다. 카루스는 교회조직에서 탁월함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회가 속해있는 공동체 전역에 주요 인사들을 배치하고, 그들을 통해서 전도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것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한 가지 문제가 발견되었다. 그것은 기도의 부족이었다. 엘마는 카루스에게 교회뿐만 아니라 카루스 개인에게도 기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였다. 카루스는 엘마의 지적을 받아들였다. 카루스는 후에 기도의 사람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엘마는 카루스의 교회에서 현장실습을 하면서 안수를 받게 되었다. 사실 감리교에서 안수를 받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고, 많은 교육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엘마의 경우에는 선교사를 지망하기 때문에 이런 절차를 생략하고 곧바로 안수받게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감리사가 선교사 출신이었기 때문에 엘마를 호의적으로 대우해 주었다, 하지만 엘마는 비록 자신이 감리교에서 안수받았지만, 감리교와 관계없이 동양선교회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그러나 엘마는 동양선교회가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감리교보다 더욱 웨슬리에 충실하다고 생각했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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