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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시문학(7)

기사승인 [607호] 2024.02.29  08: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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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탄식과 구원의 메타포

신영춘 목사(시인, 신학박사, 천광교회 담임)

메타포는 정신을 감성화시키고 의미를 애매성에 빠뜨려 극단적으로 비의미로 전락시키는 언어라는 점에서 철학적. 논리적 언어와 대립되는 문제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의미론적 관점에서 메타포는 논리적. 철학적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범위에 새로운 시야를 열어 놓는다. 

메타포는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사고를 확장 시키는 데 기여하는 적극적 언어로 수용된다. 야콥슨은 메타포를 두 실체 사이의 등가관계를 전제한 의미의 유사성 개념으로 구체화한다. 

대체로 라캉은 ‘한 능기(시니피앙)에서 다른 능기로 치환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소쉬르는 이 과정에서 의미화하는 과정, 즉 새로운 소기(시니피에)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치환의 과정에서 메타포로 사용된 자료는 사라지는 것이 은유의 성공이라고 라캉은 말한다. 한 언어로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이 지시하는 의미가 발생할 것이고, 의미가 발생하면 그 그림은 사라져야 제대로 된 메타포라는 말이다. 여기서 시니피앙(목소리)이 나타나는 것이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메타포는 명사 혹은 명칭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 전체의 범위 안에서 새로운 의미로 탄생한다. 리쾨르에 의하면 메타포는 언술행위로서 술부적 측면에서 발생한다. 리쾨르의 메타포론은 상징론의 일부로 해석학에 들어온다. 메타포는 숨겨져 있는 말의 상징을 푸는 것이며 사람의 욕망을 풀어 무의식의 언어를 해석하는 일이다. 이때 시 언어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며 꿈의 상징과 욕망의 비밀을 푸는 갇혀 있는 할 말을 풀어놓는 메타포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현대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적 장치는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한용운의 ‘알 수 없어요’에서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중략...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는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여기서 “오동잎(A)=발자취(B)”로 “A=B”로 이해가 되고 “재(A)=기름(B)”이라고 했을 때, 재는 절망인데, 기름은 희망이다. 이렇게 해서 절망이 희망이 되는 것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 시 정신의 힘은 메타포에 있는 것이다. 즉, 이 시는 메타포를 통해서 시적 생명을 얻는데 이 메타포가 시를 시작, 전개, 마무리하는 상상력의 큰 힘이 되고 있기에 시에서 메타포를 깊이 이해하면 시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기본적으로 사회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어서 통시적 시각으로 보면 점점 낡아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시대마다 언중(言衆)은 언어를 새롭게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필요성은 언어에 창조정신을 부여하고, 또한 문학의 장르인 시를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리고 시 창작을 통해서 한정 되어있는 언어의 의미를 변화시킴으로써 그 언어의 의미를 보다 확대, 심화시키는 방법론이 바로 메타포이다. 메타포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아도 그 기능성의 의미를 초월하고 극복하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휠라이트는 시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영속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인식과 인식의 양식을 깨뜨려 새로운 면을 보게 하는 언어의 기능이라고 하였다. 

메타포의 유형을 보면 다양한 형태가 있지만 보편적으로 시에서 주로 사용하는 메타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계사형 은유가 있다. 즉. “이다”로 만들어진 은유가 있다. 가장 일반적인 은유법이다. 예컨대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했을 때, “마음(A)=호수(B)”라고 하여서 직유법처럼 연결어를 직접 사용하여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연결시키는 형태이다.
(2) “의” 은유가 있다. 예컨대 “너는 사랑의 쇠사슬에 묶여서 고통을 받지 말고”에서 “사랑의 쇠사슬”은 바로 “의”는 은유가 된다.
(3) 동사 은유가 있다. 즉, “A는 B가 된다”의 형태로서 보다 역동성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은유이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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