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오리치는 제국
박용궁 목사(D.Min, 많은샘교회 담임, 미국 루터신대(LTSP) |
우리는 흔히 313년, 밀라노칙령의 사건을 놓고 콘스탄티누스의 환상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박해가 끝난 감격 가운데 유세비우스(Eusebius)가 쓴 글에 근거합니다. 그는 박해 가운데 순교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순교 대신 그는 순교한 이들과 콘스탄티누스의 업적을 감격 가운데 기록으로 남깁니다. 기록에 콘스탄티누스가 운명을 건 전투를 앞두고 기도하던 중, 빛나는 십자가 환상을 보고 그 문양으로 만든 장대를 들고 나가 전쟁합니다. P와 X를 겹친 문양입니다. 전쟁에 승리하고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 사실 목회자의 관점과 정치인의 관점은 언제나 간극이 큽니다. 실제 역사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정치적으로 노예 출신으로 군의 지지를 입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가 284년에 황제가 됩니다. 그리고 293년, 그는 제국을 사등분하여 군사 방어 체계를 혁신합니다. 동쪽은 자신과 갈레리우스(Galerius)가 통치하고, 서쪽은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콘스탄티우스 크로루스(Constantius Chlorus)가 다스리게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초기 정책에서 기독교를 탄압하지 않았기에 교회는 성장하고 심지어 자신의 부인과 딸도 기독교에 호감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국 분할 정책은 세금 징수와 재정의 문제를 불러옵니다. 그리고 303년, 304년 칙령을 통해 황제 숭배를 강요합니다. 또한 로마의 신을 섬기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는 극단적 조치까지 취합니다.
하지만 이 칙령에 소극적이던 콘스탄티우스의 지역은 순교자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나아가 이전과 달리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도 않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제국의 한 부분을 통치하게 되면서 아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를 볼모로 동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맡겼습니다.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한 후, 콘스탄티우스 크로루스와 갈레리우스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높아집니다. 이에 306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콘스탄티누스가 탈출에 성공합니다. 이제 자유롭게 된 콘스탄티우스는 정치적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박해를 실질적으로 종식합니다. 반대로 동방은 여전히 박해가 지속됩니다.
동년에 콘스탄티우스가 죽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가 군의 지지와 갈레리우스의 인정으로 왕위를 이어받습니다. 그리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Maxentius)가 이탈리아 지역의 패권자로 등장하자 이 둘은 서방의 군주 자리를 놓고 격돌하게 됩니다. 이를 위해 콘스탄티누스는 동쪽의 갈레리우스를 이은 리치니우스(Licinius)와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서 연합하였고, 같은 연유로 막센티우스는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와 연합합니다.
그런데 이집트 지역의 패권자인 다이아는 박해를 재발시킵니다. 막센티우스는 박해까지는 아니지만 이교주의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와 리치니우스에게 동조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지지기반으로써 기독교를 인정한 것은 아닐까요?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티베르(Tiber)강의 밀비안(Mivian) 다리 전투에서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합니다. 이제 서방은 콘스탄티누스의 관할에 놓이게 됩니다. 두 황제는 313년 종교 법령의 통일에 합의하여 이른바 밀라노칙령(the Edict of Milan)이 발표됩니다. 이제 기독교는 금지된 종교가 아닌 인정된 종교가 됩니다. 이제 기독교는 국가가 인정하는 종교들 중의 하나입니다. 요점은 간단합니다. 허용된 종교의 하나이지 아직 국교는 아닙니다.
이후 다이아를 물리친 리치니우스와 콘스탄티누스는 황제 자리를 놓고 격돌합니다. 리치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인정하는 것과는 반대의 정책을 폈고 이를 빌미로 콘스탄티누스는 리치니우스의 영토를 침공하여 승리합니다. 이제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후로 제국과 교회는 불가분의 밀월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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