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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16)

기사승인 [593호] 2023.09.21  22: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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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전라북도의 한 기관장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해외 유학도 다녀온 지식인입니다. 맑은 두 눈에 총기가 가득하고, 편안한 인상에 호의가, 사려 깊은 행동거지에는 예의가 깃들었습니다. 상하 직원 모두에게 평판이 좋습니다. 직원들의 투표로 뽑는 ‘내가 닮고 싶은 간부’에 선정될 만큼 올바르고 명민한 분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을 진지하게 듣습니다. 예수님 부활이 사실인지 상당히 깊은 통찰을 가지고 추적했더군요.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의 전적인 변화가 그 중요한 증거인 것도 학습되어 있습니다. 그런 이지적인 정보가 신앙으로 이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길게 예수님을 설명해 드리고 그 예수님 영접하고 신앙생활 하기를 권했습니다. ‘심사숙고하겠습니다’ 공직자다운 답변입니다만 영혼 없이 내뱉는 면피용은 아닙니다. 좋은 결실을 기대합니다.

이어 그분의 대선배요, 나랑도 교분이 깊은 장로님께 전화로 전도 동역을 구했습니다. 장로님은 “목사님, 저는 양심상 그 친구더러 교회 나가라고 못 권하겠습니다” 그럽니다.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장황한 설명이 뒤따릅니다. 요약하면 교회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도 못 미친다는 겁니다. 그 양심적이고 올바른 사람이 요즘처럼 혼탁한 교회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이상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는 주장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기준에도 못 미치는 여러 사례들을 말합니다. 세습, 금권욕, 권력욕 등의 최정점에서 세상 정치에 편향적인 문제를 지탄합니다. 마땅히 악을 대항하고 약자 보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오히려 힘 있는 편에 서서 모종의 편익을 취하고 있다는 그분의 비난에 나는 입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치가가 나서서 감당하면 좋을 역할을 하필 목사라는 옷을 입고, 정치 일선에 나서 극단의 길을 가는 전 모씨 일파의 본질을 벗어난 행태도 부끄러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분은 탁월한 논지로 그런 극단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보수, 대형교회가 가진 권력 지향성을 분석해 줍니다. 궁색한 변명으로 ‘코로나 감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병원에 가야 암을 고치지’라는 입밖에 뱉지 못한 말로 임기응변 중입니다. 내가 몸담고 살아온 교회를 변증하기 힘든 한나절입니다. 어쩌면 내가 만난 그 기관장은 죄라는 암에 걸리지 않은 순수 영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까지 미쳤습니다.

여기서 금강 건너 있는 서천에 ‘국립생태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을 지낸 ‘최재천 박사’는 생태학자입니다. 당연히 진화론자이지요. 그가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한 연설을 들었습니다. 살아온 과거를 고난의 과정으로 돌이켜 설명합니다. 충분히 양지만 걸을 수 있는데 음지로 내몰려 긴 세월을 침잠했더랍니다. 생태학자의 양심상 불이익을 감수하고서라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소회를 밝힙니다. 그 양심이 세상을 따듯하게 하는 온기라지요. 키 차이가 현저한데도 같은 높이의 의자를 주는 건 공평함인데 차가운 기준입니다. 그 공평에 양심을 얹어 키 작은 사람에게 더 높은 의자를 주는 게 공정이래요. 이 사회의 주역이 될 후배 졸업생들에게 공평함보다는 공정함을 추구하는 역할을 권면해 줍니다. 그 진화론자의 논지에서 교회가 행여 놓치고 있는 예수님 삶의 온기를 읽었습니다.

가을에 접어들어 교회들마다 전도에 집중합니다. 한 영혼을 주께로 이끄는 일은 만만찮게 어렵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강권하여 데려오는 방법이 최선입니다만 그러기 위해서는 교회가 세상을 초대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벌이는 잔치가 매력을 잃은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돈을 내면 말할 기회를 얻는 기독교 관련 방송에서 소위 걸걸하게 ‘홀리 보이스’로 내 지르는 설교는 이미 설교가 아닙니다. 지나친 자기 신념 주장으로 전락 되어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불신 세상에 폭력으로 비칩니다. 더구나 대면하여 인격적인 바탕에서 전하는 게 아니라 각종 멀티미디어를 통해 다만 언어로만 전달될 때는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력인 게 맞습니다. 세상이 알아듣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추구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이나 민주주의적 가치관은 거의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심지어 교회와 강단까지도 그 영향 아래 있는 거 아니어요? 이 불신 세상을 향해 내놓을 교회의 차원 높은 가치는 뭘까요?. 용기와 정의가 사회적 가치로 통용되던 로마 사회에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내놓던 초대 교회처럼 사회를 선도할 새로운 가치를 내놓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온 세상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낮아지는 선택이 더 효용성 있어 보입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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