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가 혼자 달려가는 자녀와 더딜지라도 함께 걸어가는 자녀들을 중 누구를 기뻐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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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영 목사(임진각순례자의교회 담임) |
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김영사)에서 일부를 옮기며 상념에 젖어봅니다.
비난과 비판은 어떻게 구별할까요? 비난은 세 가지 특징을 갖습니다. 첫째, 상대의 행위가 아닌 상대의 인간성을 공격합니다. 예를 들어 “너는 왜 이렇게 게으르니?” “당신은 도대체 내게 믿음을 주지 않아.” 하는 식입니다. 상대에게 안 좋은 사람이란 딱지를 붙입니다. 둘째, 상대로 인한 피해를 과장합니다. 예를 들어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당신으로 인해 내 인생은 완전히 망가진 거야.” 같은 이야기입니다. 셋째, 좋게 해결하려는 생각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너랑 다시 보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마. 이건 해결이 안 돼”와 같은 말이죠. 이런 말 다음에 상대가 뭐라고 말을 걸겠습니까? 미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저절로 입이 다물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비난을 하는 걸까요? 비난이든 비판이든 결국 싸움입니다. 상대가 나를 공격하고, 내 이익을 침범했을 때 나 자신을 지키려고 싸우는 겁니다. 다만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없을수록 비판보다 비난으로 흐르게 됩니다. 자기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절박해지고, 절박한 마음에 더 강하게 상대를 공격하게 됩니다.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내가 가만히 있으면 상대가 마음대로 휘두를지 모른다고 겁을 먹을 때 우리는 비난을 합니다. 그리고 내가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적을수록 비난하고, 비난하는 순간 이미 우리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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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발전적으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비판이 없을 순 없습니다. 건강한 비판은 발전을 가지고 올 수 있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비난이 되고 모든 관계의 갈등을 야기하는 중심에 놓이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세상에만 존재할까요? 교회 안에서도 존재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모본으로 하여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히10:24)” 또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라며 사랑과 희생을 최고의 가치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성도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은 오히려 비판과 비난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또한 만들어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성도 간에 서로를 위하고 격려하는 일이 만들어지기 보다는 오히려 비난과 비방 속에서 자신도 상처를 받고 상대도 상처를 받게 하는 일이 비일비재 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성도는 경쟁의 대상도 아니고 더 나아가서 천국은 경쟁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가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아버지가 혼자만 달려가는 자녀 하나를 소중히 볼까요? 아니면 비록 더딜지라도 함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자녀들을 기뻐할까요? 하나님도 나 한사람이 경쟁적으로 앞서나가는 것이 아니라 비록 더딜지라도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이끄는 성도의 연합을 더욱 기뻐하실 것입니다. 신앙은 이렇게 가도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성도를 경쟁적으로 보고 비난과 비방을 항상 곁에 두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봅시다. 건전한 비판일지라도 발전을 위한 세움과 격려로 바꾸어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7:2)” 비판까지도 금하라고 하신 주님이시기에 우리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희생을 감내하셨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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