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칼 럼 / 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9)

기사승인 [586호] 2023.06.03  21:09:32

공유
default_news_ad2

- 선생님

 

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5월에 든 스승의 날은 어찌들 지내셨는지요.

공자는 선과 악이 모두 내 스승이라(善惡皆吾師) 했고, 이로운 벗이 셋, 해로운 벗도 셋(益者三友, 損者三友)이니 이로운 것을 골라 따르고 해로운 것을 골라 자신을 고치는 기준을 삼으라 가르칩니다. 셋이 길을 걸으면 그중 하나는 필시 나의 선생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도 명토 박아 줍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랍비, 즉 선생으로 인정받으셨지만 사람들에게,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 하심으로 선생 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합니다. 이 시대 누가 이 두려운 선생의 자리에 있을까요?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때는 다정하고 따듯하고 친절한 선생님이 제일입니다. 부드러운 새싹이니까요. 사춘기를 병으로 앓는 중학교, 노도 광풍의 고등학교를 지나는 동안의 선생님은 눈매가 매서워, 도끼, 독사, 쌍칼, 독거미 등속의 별명을 가진 학생과나 선도부 선생님이 기억에 더 많이 남습니다. 갈고 다듬는 시기여서 그럴 겁니다. 웃자라는 싹을 다듬어 주시던 선생님들의 거친 가르침이 오히려 그립습니다. 대학 시절은 과제를 혹독하게 내 주어 학문을 재촉해 주신 선생님이 고마운 추억으로 남습니다. 아무래도 학창 시절은 선생님께 의존되어 수동적으로 배우는 때니까요. 그때, 그 선생님께 비친 내 학창 시절을 탐구하러 더러 학창 시절의 선생님을 찾아뵙는 것은 번잡하지만 꼭 필요한 자기 성찰의 계기가 될 것입니다.

학교를 떠나 새롭게 만나는 삶의 현장에서는 그야말로 모든 게 선생입니다. 좋은 선배, 좋은 친구, 좋은 목사님 모두가 선생입니다. 잘 만나야 좋겠지요.

세상살이에 치이고, 이리저리 뒹구느라 닳고 닳아 이른 오늘은 사람, 사건, 사연, 사물이 모두 내 선생 됩니다. 옳은 일들에 섞인 옳지 않은 것들이 더 중요한 선생 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선생이 건너편에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세상을 데려다 내 안에 담아 스스로 배워가는 과정이니까요. 내가 세상만사를 모셔다 내 선생으로 삼는 거, 누가 밖에서 뭘 가르치기 전에 스스로 삶을 배워 내는 것은 좀 더 어른이 된 표시입니다. 평생 목사로 살아오면서 매사에 ‘정답러’ 되지 않으려는 수행을 깊이 다져 왔습니다. 미력이나마 그 과정에서 배움이 컸지요.

그릇됨은 올바름의 기준을 드러내는 선생입니다. 게으름은 부지런함을 가르치는 반면교사이구요. 섣부른 것은 신중함의 가치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물론 모범적 인간상, 신앙의 모델들을 보고 따라 배우는 일은 더없이 귀중한 가치이지요. 그 학습의 장에서 스스로 선생도 되고 학생도 됩니다. 자신이 가르치고, 자신이 배워 내는 게 진짜입니다. 그러고 보면 각각은 자기 안에 선생님을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한 선생님은요. 어이없게도 후배, 그것도 자식 같은 후배들입니다. 그들은 연륜을 존중하여 내게 무얼 자주 묻습니다. 그러나 그 속내가 얼마나 명민하고 재기 있는지요. 내게 ‘정답러의 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나와 전혀 다른 별에 사는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을 가졌습니다. 때로는 울화통 터지는 경우도 없지는 않으나 기어이 맞아들여 선생 삼는 뜻은 내가 제법 낡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앞날은 그들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선생님으로 모실 때는 정말 신중해야 합니다. 그들은 결코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배우지 못하면 슬그머니 떠나버립니다. 남은 나는 ‘꼰대’ 이름표 달아야 합니다. 더불어 사는 동안에는 가장 부끄러운 이름 중 하나일 겁니다.

그 선생님들의 선생님이 계십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 깊은 뜻도 모른 채 시중의 허접한 선생으로 취급하여 ‘랍비’라고 부르던 예수님입니다. 지식을 강론하신 게 아닙니다. 그들의 기대에 답하는 ‘정답러’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선도 선생님처럼 반대자의 삶을 살아 주셨습니다. 거치는 돌이 되어 주셨고 강력한 반면교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거기 걸리고 부딪혀 터지고 깨진 사람들 중에 오랜 관습, 바리새인의 껍질을 벗고 전혀 새로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대로 선생님을 만난 셈이지요. 이 주간에는 그 선생님이 강론하여 가르치려 하지는 않으시니 스스로 모셔다가 마음 중심에 모셔놓고, 그 회초리같이 까칠하신 가르침을 스스로 받아냅시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