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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8)

기사승인 [585호] 2023.05.25  19:5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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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릎담요

               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5월의 ‘기상캐스터’들은 연일 심한 일교차를 경고합니다. 밤과 낮의 기온 차가 15도 이상 벌어지는 상황이니 제법 준비가 필요합니다. 아직 서늘한 이른 아침에 열차를 타고 서울에 갑니다. 그 일정에 맞춰 넥타이 맨 정장 차림으로 나섰습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열차 안에서는 제일 마땅한 차림입니다. 도착해서 오전 회의를 치르는 동안도 무리 없습니다. 점심 먹으러 서울 거리로 나서니 모두가 반 팔 차림입니다. 넥타이에 겉옷까지 걸친 나만 여지없이 궁상맞습니다. 서울의 낮 기온이 30도를 훌쩍 넘은 날이었으니까요. 

새벽 예배 시간에도 서서 예배를 인도할 때는 겉옷 없이 와이셔츠 바람이면 됩니다. 그런데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깨가 서늘합니다. 그래서 사시장철 기도실에는 무릎담요 한 장을 두고 지내지요. 캐시미어같이 값비싼 재질은 아닙니다. 폴리에스터지만 잘 가공한 덕분에 포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싼값에 나도는 담요입니다. 이걸 어깨에 턱 걸치고 가슴으로 여며 쥐면 그 온기와 아늑함이 안정감을 줍니다. 팍팍한 기도 시간이 온화해지는 거지요. 장기간 금식 기도로 들어앉은 적이 있습니다. 힘든 일이지요. 몸 가누기가 힘들었습니다. 바짝 야윈 사지가 배겨서 아픕니다. 조금 더 푹신하기를 바라서 이불을 두껍게 깔고 덮고 견디던 것도 그 중 큰 고통으로 기억됩니다. 두꺼운 이불 위를 어기적거리다가 메마른 광야에서 그 긴 시간을 이렇다 할 보조 수단 없이 견디셨을 주님의 고통이 뼈저리게 와닿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기억 속의 이불이거나, 이 새벽의 무릎담요가 시린 어깨 아픈 마디 감싸 주는 어버이 손길 같다가 마침내 하나님 손길로 와 닿습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게시하는 영성을 따습게 느낍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한 장면, 아버지 돈 미리 당겨서 호기롭게 집 나갔던 아들 이야기입니다. 집 떠난 세상살이 한 바탕이 녹록지 않았습니다. ‘허랑방탕’이라고 표현되는 소용돌이 한바탕을 건너 터덜터덜 실패의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둘째 아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의복은 남루하고 신발은 다 떨어졌습니다. 어디에도 수용될 수 없는 몰골입니다. 그런 아들을 맞아 품에 안는 아버지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거의 눈이 먼 듯, 아무 수식 없이 늙어버린 표정으로 ‘그눔’을 얼싸안거든요. 그릇된 아들을 향한 선악 간 심판을 유보하는 눈 감음으로 읽힙니다. 시간을 멈춰 두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표정에 압도되어 생각도 멈춥니다. 소용돌이 인생을 사는 나를 덮는 무릎담요입니다. 꿈틀거리는 약동이 모조리 용해되어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그 품에 안긴 둘째 아들의 안도감을 경험합니다.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 그 아들을 감싸 안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왼 등짝에 얹은 오른손은 여리고 가냘파 보입니다. 어머니 손 같다고 할까요. 오른 어깨에 두른 왼손은 듬직하고 두툼한 아버지 형국입니다. 그린 이의 마음이 드러난 손 모양입니다. 그 품 안에 든 둘째는 무릎담요 덮어쓴 만큼이나 안온해 보입니다. 아버지 손 닿은 자리가 꼭 내 시린 어깨 자리거든요. 그 정확한 혈 자리를 짚어 손을 얹은 걸 보니 화가 ‘렘브란트’도 틀림없이 어깨 시린 경험이 있었을 것이구먼요. 

담요는 단순히 한기를 막아주는 것에 덧대 뭐든 덮는 덕목입니다. 그 안에 든 게 무엇이든 싸매는 일입니다. 그게 제법 높은 복음적 가치라는 걸 배웁니다. 간음하던 지난밤의 행실이 까발려져 군중 앞에 붙들려온 여인의 처참한 몰골이 주님 앞에 서니 기막히게 가려집니다. 그 처방이 무릎담요 같습니다. 까발리는 건 양파 벗기기처럼 없는 실속을 끊임없이 드러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반대로 덮어 두면 싹도 나고, 상처도 났습니다. 작은 상처에 임시 처방으로 붙이는 ‘밴드’가 유용합니다. 상처를 감싸거든요. 하룻밤 지나면 통증도 가시고, 피도 멎고, 아물어 듭니다. 사람마다 왜 아프지 않겠어요. 상처도 부지기수지요. 잘 덮어 두면 성나지 않게 가라앉아 잦아들 아픔입니다. 덮어 주지 못한 상처들은 긁혀서 더 아프고, 곪고, 덧나서 기형적으로 변질합니다. 덮어 주지 못한 상처는 곪고 덧납니다. 덮어 주지 못한 아픈 마음은 대부분 병적 신앙, 이단으로 곪아갑니다. 암으로 자란 것이지요. 그리되기 전에 우리가 값싼 무릎담요 한 장 챙겨 외롭고 아프고 시린 그들의 어깨를 따습게 덮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까발리는 건 득이 없습니다. 따습게 덮어 두는 것이 주님의 처방입니다. 그럼요!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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