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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 최현준 목사가 읽은 책 

기사승인 [578호] 2023.03.22  18: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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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준 목사(기성 하늘동산교회)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 저자: 김학철, 출판사: 비아, 출판년도: 2022.

동아시아 문명에서 ‘자연’(自然)은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주는 것에 반해 인위 혹은 인공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무엇인가 우리에게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 반면 서양에서는 자연을 ‘야만’으로, ‘문명’은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 이해한다. 흥미로운 점은 기술과 문명의 발달할수록 인간의 정신은 ‘숲’을 향한다.

고갱은 그의 그림《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통해 인간이 외면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대면하도록 초대한다.

수천 년 전, 누천년에 걸쳐 기록된 성서의 구절을 붙들고 나름대로 해석한 말씀을 자신의 혼과 영과 육으로 그려낸 화가의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중요하지 않은 듯 뒤로 미뤄놓은 삶의 질문을 던지고, 과연 화가가 그려낸 말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던지는 질문 속에 침잠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인 김학철 교수는 영원에 관해 묻고 서로의 지식과 경험을 겸손하게 나눌 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지고, 그래서 하나님에게 다가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많은 정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 많은 질문, 그것도 영원과 진리와 아름다움을 향한 물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화가들이 해석하여 그려낸 성경은 우리가 고찰하지 못한 성경 이면을 밝히 그려내어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삶의 고뇌와 신앙의 기쁨과 말씀의 깊은 은혜를 경험케 한다. 인간은 삶의 주름에서 근원의 기쁨이 영글어간다. 그렇기에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은 입 맞추며 그 행복을 서로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책은 부족하나마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구현하려는 시도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란 성서를 이미지로 해석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성서와 예술 작품이 서로를 비춰 새롭게 읽으려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독자가 성서 본문과 ‘성서-이미지’를 동시에 놓고 성서 본문으로 성서 이미지를 감상하고 성서-이미지를 통해 성서 본문을 읽을 때 일어나는 교차적 이해와 성서 메시지의 예술적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에서 ‘성서-이미지’란 성서의 이야기나 성서적 주제 혹은 소재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시각예술을 가리킨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성서 본문과 성서-이미지를 서로 엮어 읽으며 그로부터 발생하는 교차 이해에 주력한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독자/관람자가 얻은 교차적 이해를 예술적으로 표현하도록 독려한다. ‘예술적 표현’이란 글쓰기, 형식을 갖춘 대화극, 이미지 혹은 영상 제작, 공연 및 연주 등의 가시적 형태로 교차적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른바 퍼포먼스 비평의 통찰을 수용하는 것이다. 퍼포먼스 비평은 성서가 탄생한 구술문화 시대의 성서 읽기는 기본적으로 일종의 공연이었음에 착안한 것이다. 성서는 혼자 ‘읽기’가 아니라 청중 앞에서 ‘읽기’ 곧 낭송을 위해 고안되었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 그리고 그 읽기를 ‘예술적 표현’으로 달성하려는 노력은 최종적으로 우리 삶과 관련 있다. 곧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독자가 신상(神像)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다.

다른 종교의 신전에는 신의 형상이 있기 마련이지만 예루살렘 신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솔로몬이 만든 신전에는 야훼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신상을 대신했지만, 이른바 제2 신전(헤롯 신전)에는 법궤조차 없었다. 유대인들은 신전에서 희생 제사가 불가능해지자 율법 공부를 제사에 해당하는 종교적 행위로 간주하는 식으로 신전 없는 종교를 발전시켰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종교가 ‘신전 없는 종교’보다 더 독특한 ‘신상 없는 종교’였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신상은 신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신상이 없는 신이란 동시대 사람들에게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야훼의 신상을 만드는 것을 금한다. 신상 없는 종교는 본질상 신상을 둘 신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신전 파괴는 도리어 구약 성서 신앙의 핵심으로 되돌아가게 한 셈이다. 그래서 요한의 세례는 신전 제의의 전면적 거절을 상징한다. 그렇기에 예수는 하나님을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냄새 맡는 공간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만난다. 예수 몸-신전은 “(예루살렘) 신전보다 크다”(마태 12:6) ‘크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 공간과 관련이 있다. 두세 사람이 예수의 이름으로 서로 사랑하며 만나는 곳에는 ‘임마누엘’의 신전 사건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며 그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루살렘 신전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렇기에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신전임을 선언한다(고전 3:16-17, 고후 6:16).

하나님은 그의 영을 교회로 모이는 사람들에게 두고 그 모임을 신전으로 만든다. 바울의 이 사상은 본래 창세기의 사상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 고대인들의 신과 신의 신상 사이의 관계를 배경으로 놓고 이해하면, 인간이 바로 야훼 하나님의 신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신상을 직접 만들어, 그가 만든 세상에 둔다. 그러니 그가 만든 세상은 실상 신전 자체이고, 그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인간은 바로 신의 대리인이 되는 셈이다. 신의 대리인은 특정한 누군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어진 모든 인간이 신의 현현이다. 그렇기에 예수가 드린 제사는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며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는 제사였다.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담대하게 하나님과 긴밀히 사귀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제부터는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 있는 몸으로 드리는 제사를 행해야 한다.

야훼 하나님을 나타내는 신상을 절대 만들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선언을 배경으로 읽어야 한다. 신상을 따로 만들면 안 되니, 그것을 따로 둘 신전을 전면 부정하는 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있는 모든 곳이 신전이라는 의미다. 그러니 애당초 성서는 온 세계를 신전으로, 모든 인간을 신상으로 선언하는 급진적 가르침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곧 그분의 형상으로 이 세상을 신전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몸이 신전이고, 그를 통해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오감으로 체험하도록 살았다. 따라서 그를 따르는 이들의 몸, 그리고 그 모임이 신전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한 산 제물로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람들의 모임은 임마누엘의 신전이 된다.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이 세상과 길항하면서도 새 세상의 꿈이 실현되는 움직이는 신전이다. 신앙인들은 성서의 뜻에 따라 세상을 신전으로 삼고 신상으로 살아간다. 이처럼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종국에 신의 형상으로서 살아가기를 향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삶의 신앙-예술적 형상화다. 성서 본문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예술화하려는 노력은 우리 삶을 시각화하고 나아가 신앙-예술화하려는 것으로 향한다. 성서를 읽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신앙-예술품으로 조형해 나가려는 것이다.

계몽주의 이후 학자들은 종교의 쇠락 혹은 몰락을 예언했다. 그러나 종교에 대한 전망은 극적으로 바뀌었고, 이제는 ‘종교 문맹’을 극복하는 과제가 한층 더 중요해졌다. 종교 문맹이란 세계 종교 전통에 대한 기본 이해가 부족하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융합하고 전개된 전통의 표현과 신앙의 다양성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하며, 종교가 동시대와 역사에 걸쳐 인간 사회, 문화, 정치 영역에서 수행한 중요한 역할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종교 문해력은 인간 이해라는 여러 학문의 궁극적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 렐리기오수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교적 시각 문해력’은 시각적 문해력을 종교적 혹은 영적 전망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다. 간략히 정의하면 시각적 문해력은 이미지를 만들고, 이해하고, 내면화하고, 그것을 의사소통하는 능력을 뜻하는데, 종교적 시각 문해력은 시각적 문해력에 종교적 전망을 추가하는 것이다. 종교적 전망은 이미지의 창조, 이해, 수용, 소통 과정에 이바지한다. 터키 괴베클리 테베의 발견은 사회가 종교를 필요로 한다는 주장을 뒤집는 것으로 오히려 “신전이 탄생하고 다음에 도시가 왔다”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것은 종교가 인간 문명의 이미지 탄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매우 오래된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이미지의 탄생이 종교적 근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한 가장 강렬한 반대가 종교 영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은 역설적이다. 서양의 종교개혁 이후 이미지의 권위는 진리인 성서를 해명하거나 그리스도교적 정신을 강화하는 선에서 허용되었다. 그리고 예술은 세속화에 따라 종교와 관련 없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 세속화가 심화하고 이성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이후 오늘날까지 예술과 종교의 관계는 분리의 성공과 실패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서평>

성서의 시각적 읽기는 경직된 채 너무 한쪽에 치우쳐 이해하고 있던 우리의 이해를 넓혀주며 말씀 속에 담긴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섭리를 더욱 폭넓게 이해해주는 장점이 있다. 성경을 낯설고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라잡이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다. 동시에 다양한 이미지를 접하지 않는다면 한 가지의 이미지로 말씀의 해석이 고착될 여지 또한 존재한다.

그러나 다양한 예술적 표현을 접하며 좀 더 다양한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노력한다면 우리의 생각과 신앙의 지경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한국에 기독교에 들어온 지 14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동안 많은 신학의 유입과 신앙생활에 대한 고민을 통해 한국교회는 조금씩이지만 변화를 경험하였다. 그렇지만 사회는 아직도 경제의 속도가 시속 160km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을 때 교회는 4.4km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고자 하는 우리의 결기이지만 동시에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가 백안시하였던 성서의 시각적 읽기의 영향이 적지 않을 것이다. 성서의 시각적 읽기에는 주의할 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깊고도 다채로운 성서의 해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토록 등한시하였던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더는 도외시할 수 없는 세상이다.

이미 MZ세대는 두꺼운 성경보다 3분 설교나 몇 장의 카드 뉴스에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작금의 현실은 그동안 경시하였던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우리가 먼저 선점하여 우리의 성도들과 청년들이 보다 안전하고 은혜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제시해야 하는 시대로 내몰리고 있다.

더 나아가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통해 신자가 신상(神像), 즉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권면하고 인도해야 한다. 현대는 내용과 실속보다 마케팅을 통한 이미지관리와 스토리텔링에 이목이 쏠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시각적 읽기를 통해 성도들은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면?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감으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러브스토리를 광고하는 광고판이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팝업 스토어가 될 수 있다면 성경의 성스러움과 인생의 아름다움이 입 맞춘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행복과 평안이 충만하게 되지 않을까?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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