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12)

기사승인 [574호] 2023.02.01  17:22:38

공유
default_news_ad2

- 김용은 목사의 생애

                         김용은 목사

그 해 5월 23일이었다. 첫 부임지는 충남 공주성결교회였다. 용은보다 서너 해 선배인 정진경 목사가 섬기고 있었다. 용은은 부임을 위해 교단 어른과 선후배 등에게 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어머니 윤임례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뒤 공주로 가기로 했다.

1950년 6월 25일자 미국 성조지는 호외를 발행해 한국 전쟁이 발발했음을 알렸다. 용은은 공주로 가지 않고 두암교회에 머물렀다. 전쟁이 터졌다고 고향을 두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성도들에게 나라를 지키자고 호소했다.

◆ 학살 배경과 두암교회 순교사

두암교회 교인 학살 당시의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첫째는 전봉준, 최제우, 손병희 등이 주도한 동학혁명이 이웃 마을인 고부를(두암에서 6km) 중심으로 일어난 후, 빈곤에서 벗어나려는 강한 저항의식이 농민들의 마음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둘째는 일본의 압제로 가난한 농민들이 추수한 쌀을 강제로 공출하여 일본에 군량미를 보냄으로 인하여 양식 없이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외세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마지막으로는 6.25의 전쟁 일어나기 전 북한이 남한을 공격하기 위해서 많은 빨치산(Partizan)을 남파하므로 사회적 불안이 가증되어 있었고 혼란에 빠져 있었다.

좋지 않은 소문은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지리산 줄기를 타고 있는 정읍 주위에 있는 산들은 이미 빨치산이 들어와 있었다. 매일 밤이 되면 마을로 내려와서 가난한 농민들의 마음을 읽고 공산당만이 농민들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선전을 하며 농민들에게 헛된 꿈과 희망을 갖게 하였다. 소성면은 빨치산들이 지리산, 순창 회문산, 내장산을 거쳐 변산으로 다니는 통로였다.

빨치산을 동조하는 공산 좌익세력들이 그 지역에서도 생겨났다. 공산당은 같은 동족이므로 외세에 대한 두려움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농민들은 생각했다. 공산당은 미국 제국주의자들의 거짓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악선전을 함으로 반미 운동이 순식간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아무리 나쁜 공산주의라도 같은 동족이므로 일본 사람이나 미국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바꾸기에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신앙의 자유를 주겠다고 하면서도 반면에 기독교는 아편과 같이 나쁜 종교라고 농민들에게 루머를 퍼트리며 기독교에 대하여 펌하하므로 저항의식을 갖게 하였다.

당시 신앙을 갖는 것은 초기 기독교가 들어올 때보다 더 어려웠고 순교적인 신앙이 아니면 신앙생활을 하기 어려웠었다. 농민들은 거짓 선전을 믿고 공산당을 환영하게 되고 교회 안에도 공산당을 환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에 감히 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1950년 7월 중순 인민군이 정읍에도 들어왔다. 바로 정읍인민위원회가 조직됐고 북조선 공산당 정읍 군당이 치안을 접수했다. 소성면사무소 사무 일체도 정치부대가 접수하고 그것을 인민위원회에 넘겨줌에 따라 낯선 이들이 장악했다. 지서도 치안대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완장을 차고 지켰다. 불과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다.

윤임례는 아들 용은에게 피난을 종용했다. 남쪽으로 가 먼 친척이 사는 섬으로 들어가라고 했다. 용은은 어머니의 진심을 알았으나 성도들을 두고, 어머니를 두고, 형제들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어느 날 용은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밖에서 소동이 일었다.

“반동 김용은! 나와서 순순히 갑시다. 조선 인민을 괴롭히는 교회를 세우고, 그 수괴가 되어 마을 주민을 미 제국주의자 앞잡이로 만든 죄를 인민들 이름으로 조사받아야 할거요!”, “전도사 동무, 동무는 일본에 가서 무엇을 했소? 또 흥남에서 기층 민중을 착취해 돈을 벌어 어디다 썼소?

미 제국주의자들을 섬기는 교회를 지어 인민의 아편이 되어서야 되겠소? 동무는 조선 인민을 비웃는 악질 중에 악질이오. 게다가 우리 김일성 장군을 비방하는 강연을 하고 다녔소. 독립 운동가이고 조선 인민의 영웅을 모욕한 죄를 용납할 수 없소.”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