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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전킨 선교사' (38)

기사승인 [554호] 2022.06.22  18: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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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선교사 시절, 나의 아버지

전킨 선교사 (1865년 12월 13일 ~ 1908년 1월 2일)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국 남장로교에서 파견된 일곱 명의 선교사로서 1892년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의 서울에서 큰형이 18개월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나는 형을 기억할 수가 없다. 그 당시 아동의 건강을 관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건강 관리를 위해 물을 다 끓여 먹고 여러 가지 노력을 하였지만 내 형제 중, 세 명이 죽었다. 형과 두 명의 동생이 천국에 먼저 갔다.

 내가 세 살 때, 두 가지가 기억나는데, 첫 기억은 슬픈 기억이고 둘째 기억은 슬프지만 좋은 기억이다. 첫 번째 기억은 동생 시드니가 군산에서 사망하여 한국 사람이 어깨에 하얀 상자를 메고 언덕을 올라갔고 아버지는 그 한국사람 뒤를 따라갔고 나와 동생 윌리암도 따라갔다. 둘째 기억은 조지는 서울에서 사망하여 서울에 묻혔고, 시드니는 군산 선교사 묘지에 매장하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억은 우리는 궁멀 강에 근접하여 있고 뒷마당은 진흙 바닥인 한국 사람의 집을 빌려서 살았다. 강변 뻘에서 뻘게가 올라오곤 하였다. 우리들은 그 갯벌에 가서 놀기도 하였다. 어느 날, 우리가 제방 아래 갯벌, 진흙 탕 속에서 맨발로 재미있게 놀고 있었는데, 뻘게가 내 엄지 발가락을 물었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아버지와 면접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던, 잘 손질된 하얀 한국 옷을 입은 남자 분이 진흙탕에 첨벙거리고 들어와서 나를 안고 내 엄지발가락에서 뻘게를 떼어내고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갔다. 부모님이 나와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 사람은 예수 믿는 성도는 아니었지만 말씀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타국보다 예수님이 잘 전해지는 것이었다. 과거에 일본의 식민지 국가였고, 계층 사회였던 한국에서 학자는 양반이었고 병사는 하위 계층이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배우는데 열심이었다. 기독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예수를 구원자로 영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내 아버지는 봄에 시간이 있을 때마다 이런 분들을 모셔놓고 예수님에 대해 가르쳤다.

궁멸에서 5-6미터 떨어진 언덕을 선교사들이 매입하였다. 오른쪽 군 마을에는 썰물 때 40-60야드 정도의 진흙 제방이 있었다. 군산 서쪽에는 중국이 있는데 군산 해변은 세계적으로 밀물과 썰물이 심한 곳이다. 이 갯벌을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린 내 동생 그리고 대여섯 살이었던 내 친구와 함께 달리기도 하였다.

 그때 아버지는 건축사는 아니지만 건축 임무를 수행하였다. 선교국에서 명령하신 선교사 두 가정과 함께 병원을 짓는 일을 했다. 한국인을 고용하여 미국 양식의 집을 짓는 방법을 가르치며 집을 지었고 엄마는 블록을 쌓는 전문인은 아니었지만 한국 일꾼에게 블록을 어떻게 쌓는지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건축할 당시 한국 돈을 지불하였고 지금도 나는 8세기, 14세기 때의 동전을 가지고 있는데 그때 당시는 중국 엽전과 한국 엽전을 서로 교환할 수 있었다. 백여 개의 한국 엽전을 새끼줄에 꿰어가지고 다녔다. 일꾼들에게 매일 현금으로 일당을 줘야했기 때문에 매일 이렇게 많은 현금을 어떻게 안전하게 보관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작은 헛간을 지어서 입구 문에 자물쇠를 달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엽전을 헛간에 넣으러 들어가서 헛간에 갇혀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다행히도 아버지가 자물쇠를 비틀어 헛간을 빠져 나오셨다. 그 자물쇠가 그렇게 강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둑을 놀라게 해서 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는 있었다.

아버지는 6주 정도씩 초보 기초 교육을 위해 집을 떠나 있었는데 이를 순회 설교라고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한국 사람들에게 억지로 예수를 믿도록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있는 한국 사람들은 학구열이 높았고 우리 아버지는 유머를 잘하기도 해서 아버지를 매우 좋아했고 아버지도 한국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아버지는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와 예수 방식의 삶을 소개하고 한국 사람들이 원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도록 하였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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