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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초의 전킨선교사 (33)

기사승인 [549호] 2022.05.06  15:2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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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킨 선교사 (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회색 담요 아래 들 것을 짊어진 모습으로 군산까지 50km를 가는 슬픈 행렬의 뒤에서 어머니는 어깨에 묶인 네 명의 운반자가 메고 있는 고리버들 의자 하나를 탔고, 보모 엄마는 마리온과 토야를 무릎에 앉히고 다른 남여(藍輿)를 탔습니다. 나와 동생 빌은 아버지 선교사 친구와 함께 한국 조랑말을 탔습니다.

우리 아버지의 시신은 군산 항구 금강에서 약 4km 떨어진 궁멀 언덕에 있는 선교 묘지에 묻혔습니다. 며칠 후 우리는 전주로 돌아가 봄까지 머물면서 가구들을 나눠주고 작은 물건들을 챙겨서 다시 마차로 군산항으로 갔습니다. 한국을 떠날 때 보고 생각할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가 작은 배로 일본 증기선까지 가는 동안 보모도 토야와 함께 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 길고 낮은 계단을 오르는데 흔들리며 올랐던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보모가 아기를 조심히 다뤘다고 생각합니다. 보모가 전용실에 있는 우리 모두를 그녀의 팔로 껴안고 울부짖는 느낌은 있었지만 이별을 기억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선교사 친구인 맥커천(McCutcheon) 씨는 휴가를 갈 예정으로 우리와 함께 미국으로 갔습니다. 고베에서는 아버지와 신학교 때부터 친하셨고, 지금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헤리 마이어스 Harry Myers)가 배에 타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토야에게는 딸랑이를 주었습니다. 내 것은 끈으로 움직이게 하는 작고 검은 물건이었습니다. 망가졌지만 아직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헤리 마이어스 선교사의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한국에 있는 우리 집을 떠나면서 배에서 우리는 줄곧 슬픔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고베와 요코하마에서 우리가 큰 원양 정기선으로 옮겨 탄 기억은 없습니다. 영국 엠프레스 라인, 인도 엠프레스 또는 중국 엠프레스 라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태평양은 항상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매우 거친 여행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우리의 첫 번째 피난처는 볼티모어 외곽의 멕도너 소년(Mc Donough Boys)학교였습니다. 삼촌과 숙모, 시드니와 샐리 모어랜드와 함께 지냈습니다. 시드니 삼촌은 교장이었습니다. 8월 20일 알프레드는 그곳에서 태어났습니다. 토야는 당시 17개월이었습니다.

가을에 우리는 프레드릭스버그(Frederichsburg)로 이사했는데 당시 남장로교회는 한 작은 대학과 대학 예비학교를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캠퍼스 근처의 아담한 집을 4천 불에 구입했습니다. 당시 인구 8천 명이 살고 있는 이 프레드릭스버그에서 우리는 1914년 6월 졸업 후 자금 부족으로 대학이 문을 닫을 때까지 6년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장로교회와 주일학교에 다녔으며, 주일학교 예배는 석조건물 예배당에서 드렸습니다. 이 건물은 할아버지 에드워드 레이번(Edward Leyburn)이 건축하였습니다. 토야는 처음으로 교회학교 유아반에 출석했습니다.

프레드릭스버그에서 토야에 대한 나의 가장 생상한 기억은 큰 오빠로 훈계를 잘못하려고 했을 때였습니다. 토야가 다섯 살 때입니다. 어머니는 그날 오후 집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토야가 무슨 일을 하였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는 토야를 잠시 화장실에 가두어 벌을 주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 토야는 갑자기 엄청 격렬히 화를 냈습니다. 나는 전략적으로 재빠르게 물러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어릴 적 기억나는 토야는 보통 의젓하게 행동하는 어린 소녀였지만 어떤 때는 단호하고 자기 주도형 성격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의지를 꺽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토야의 렉싱턴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대해서 나는 아는 게 없습니다. 토야의 첫 학교 경험은 1914년 여름인가 가을에 이사한 렉싱턴에서였습니다. 나는 렉싱턴에서 단 2년 동안 워싱톤 앤 리대학교에서 MA를 취득한 다음 뉴 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교사 겸 축구 코치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칸사스(Arkansas)의 로간 항구(Port Logan H. Roots)에 있는 제일사관학교훈련소(First Officers ‘Training Camp)에서도 코치로 있었습니다. 나중에 메리온과 알프레드와 함께 렉싱턴에서 살면서 토야는 가장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토야는 렉싱턴 고등학교(the Lexington High School)를 졸업한 후 사촌 에드워드와 프란시나 모어랜드(Francina Moreland)의 도움으로 2년 동안 아그네스 스콧대학(Agnes Scott College)에 다녔습니다.

이 기간이 토야에게는 별로 좋은 발전을 준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때 학교생활이 그녀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야는 보스턴의 베스퍼 조지학교(Vesper George School)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하였습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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