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호남 최초의 전킨 선교사’(23)

기사승인 [539호] 2022.01.20  13:38:25

공유
default_news_ad2

- 전주에서 전킨의 후반부 사역

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 ~ 1908년 1월 2일)

1905년 2월에는 전주의 양반 두 사람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는 전도의 열매를 맺기도 했는데 포사이드가 강도에게 피습을 당하던 중에 양반들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고, 그 양반들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양반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또 한 번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또 해산한 구한국군인들도 교회에 나오게 되고, 심지어 일본 군인들도 교회에 나왔다. 그렇게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어 주일학교 남자반은 마당에서 집회를 열어야만 했다.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집을 집회 장소로 내놓으면서 그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칠 기독교인들을 보내 달라고 할 정도였다. 1905년부터 1906년까지 전킨이 주도했던 전주 서문밖교회는 평균 360명이 출석하였고 많을 때는 600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성장하고 있던 전주 서문밖교회는 전킨의 부임 이후 더 큰 성장을 했다.
전킨은 1907년을 “남장로교 선교 역사상 최고의 해”라고 말하는데, 4월 개최된 성경반 모임에서는 굉장한 은혜가 임했다고 보고한다. 두 주간 진행된 집회에서 교인들은 매일 정오 기도회를 가졌는데 거기서 은혜가 시작되었다. 30분씩 하기로 되었던 기도회는 두 시간씩 계속되었고, 급기야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를 눈물로 뜨겁게 회개하였다. 이른바 전주 부흥운동의 시작이 바로 이때 일어나게 된 것이며, 이를 통하여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


◆ 김제와 금구사역
전킨이 전주에 오게된 이유는 군산 선교에 집중하다 보니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그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를 전주선교부에 파송하였지만 전킨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휴식할 성품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더 일을 만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겼다.
전주에서의 사역뿐 아니라 지방 사역을 겸하였다. 그곳은 김제와 금구였다. 이전에 군산 선교부에서부터 선교를 이어왔던 곳이다. 전킨이 그곳들을 방문할 때는 환등기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촉발하였다. 1905년 가을, 전킨은 혼자서 그곳들을 다시금 방문했고, 겨울에는 조사 김필수가 그 사역을 이어가게 했다.
김제 선돌교회에서는 다섯 명의 학습 교인이 생겨났고, 네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독립적인 교회를 포기하고 군산교회로 돌아가려고 했으나 전킨이 단호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주의를 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다시 변화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는 때로는 준엄하게 때로는 자비롭게 대하며 진리를 가르쳤다.
금구 성말교회에서는 일곱 명이 세례를 받고, 60명의 교인들이 제사를 공개적으로 포기하기로 결단한다. 그리고 언덕 위에 예쁜 예배당을 세웠다. 그곳은 이미 전킨이 군산선교부 시절 위치를 정해준 곳이었다.
김제와 금구의 선돌교회와 성말교회는 전주교회처럼 직접적으로 늘 상주하지 못하였지만 순회 방문을 통한 그의 치리 안에서 발전하며 성장하게 되었다.


◆ 전주남학교 사역
전주남학교(신흥학교)는 군산선교부로 이동한 헤리슨 선교사에 의해서 1901년 전주의 선교 구내에서 시작되었다. 계속 늘어나고 있던 전주교회 교인들의 자녀들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교회 구성원인 학부모들은 여덟 명의 아이들을 헤리슨의 학교로 보내주었다.
그 후 전주 남학교는 지속되었다. 1903년 헤리슨의 기록을 보면 전주 남학교는 1902년 11월 11일 신학기를 시작으로 헤리슨과 그의 부인 데이비스에 의해서 수업이 진행되었으며 열여섯 명의 재적에 열한 명이 출석하였다. 학생들의 평균 나이는 12세였다.
그곳에서는 전통적인 한국 교육방식인 큰 소리로 글 읽는 과정을 탈피한 것과 1주일에 5일씩 매일 오후 4시까지 일과를 진행하는 것, 개인용 책상을 준비하는 등 한국 학교와는 다른 모습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헤리슨에 이어 전킨이 학생들을 지도하였는데 전킨은 지리와 산수, 작문 과목을 맡아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1907년에는 열여덟 명으로 시작되었는데, 학기를 마칠 때쯤에는 마흔 명으로 증가하게 된다. 전킨은 바쁜 와중에도 하루에 네 시간씩 시간을 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킨은 심혈을 기울여서 열심히 학생들을 돌보았다.
하지만 전주남학교는 초등교육밖에 시킬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남장로교 전주남학교에 우수한인재를 보내기 꺼려하였다. 게다가 이미 전주에는 백 명 이상 수용할 수 있는 학교가 세워져 있었다. 전킨은 다른 교파나 다른 곳에서 실시하고 있는 교육 수준이 자신들보다 훨씬 앞서고 있음을 파악하게 된다. 그로 인해 전킨은 선교본부에 교육사업 확장을 위해 전문가의 지원을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