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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초의 전킨 선교사’ 연재(17)

기사승인 [533호] 2021.11.25  18: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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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산 선교의 열매들

전킨 선교사(1985년 12월 13일 ~ 1908년 1월 2일)

1897년 10월 제6차 남장로교 선교사 연례회의가 군산에서 진행된다. 아동과 여성의 교육에 힘쓰던 린니 데이비스가 운영하던 사랑방에서 개최되었다. 이때 드루의 딸 헬렌(Hellen Virginia Drew)이 연례회의에 참석한 체스터(S.H. Chester) 선교사로부터 유아 세례를 받는다. 체스터 선교사는 100마일 떨어진 곳에서 걸어와 드루에게 치료를 받는 두 명의 한국인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체스터 선교사는 드루 선교사를 “뜨거운 심장을 가진 의사”라고 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군산에서 개최된 제6차 연례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은 군산 스테이션을 지속하기로 한 것이다. 드루와 전킨 선교사의 군산 사역의 열정과 전킨을 설득한 드루의 열정이 지금의 군산 선교 복음화의 초석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 의료 선교사로서 드루의 발언권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선교부로서는 드루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군산에 대한 드루 선교사의 열정과 군산에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로서의 헌신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드루는 처음부터 군산 선교에 대한 의지가 강했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이곳 땅을 밟을 때 처음 가졌던 마음(군산은 아름다운 땅)과 군산이라는 공간에 대한 사랑이 군산을 지켜냈다고 생각한다.

당시 군산 사역의 성장 모습은 다른 선교사들의 기록에서도 관찰된다. 팻시 선교사(레이놀즈 선교사 부인, 전킨의 부인 매리 레이번 절친)는 군산 사역이 신속하게 성장하고 있으며, 전킨의 성경 공부반, 리니 데이비스의 야간 성경 공부반의 참여도가 높고, 드루의 의료 사역이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고 하였다.

의사라고 진료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복음 전도뿐 아니라 교육 선교에도 동참하였다. 그는 손수 오르간을 치고 음악을 가르치고 젊은이들에게 세계 지도를 가르치며 그가 어린 시절을 겪은 영국 이야기와 미국 역사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관한 인류학적 상식을 넓혀주는 일에도 열정이 있었다.

팻시 선교사는 봄 학기에 개강한 교실에서 5명의 남자 청년들이 일주일에 ‘하룻저녁’은 세계 지도를 배우고, 이틀은 노래 강습을 위해서 모였는데, 드루가 오르간을 치며 인도했다고 전하였다.

드루는 작은 배를 타고 금강과 만경강을 오르내리며 의료 선교를 하였다. 드루는 능력 있는 외과 의사로 그가 용하다는 소문이 전라도뿐 아니라 금강을 건너 충청도 마을까지 확산되었다. 어둡고 침침한 군산의 작은 집에서 그는 늘 쉴새 없이 밀려드는 환자를 맞이했다. 사람들은 드루의 집에 높게 걸린 성조기를 보고 “지금 진료 중”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왔다.

1899년과 1900년 군산 선교는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고 보고 한다. 본부에 보고한 내용 중에는 “미국 교회는 군산에서 배워야 한다”는 말까지 있었다. 이러한 성장의 일차적인 원인으로는 드루의 의료 선교가 폭발력이 있었다고 보고한다.

드루의 선교선(mission vessel)은 미국의 지인들이 모금해서 주었고, 금강과 서해안 일대를 순회하면서 시작한 선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충청남도에 있는 장항을 비롯해서 옥포, 임포, 청소 그리고 내륙에 있는 서천, 화산, 한상까지 진료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군산을 비롯한 나포, 웅포, 강경까지 다녔으며, 김제와 익산지역, 심지어 김제 백구면에 있는 난산에까지 환자가 있는 곳은 어디든지 찾아 나섰다. 이러한 무리한 활동이 드루의 건강을 해쳤다고 본다.

1899년 일본의 개항 압력으로 드루 진료소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서 옥구군 개정면 궁멀로 이사를 한다. 1899년 12월 21일부터 예전과 마찬가지로 야소병원(구암병원, 궁멀병원)으로 진료를 계속하였다.

1901년 드루는 과로로 인해 병을 얻게 되었고, 본국 선교본부에서 건강을 염려하여 소환 조치를 하였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버지니아로 돌아가지 않고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에 정착했다. 그가 한국에서 일한 8년 동안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은 그에게 단 한 통의 격려나 위로 편지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항만에서 검역관으로 일하면서 한국인 교회에 출석하였다. 미국 입국비자도 없이 수용소로 끌려가던 도산 안창호 부부에게 신원보증을 해주어 입국을 도왔다. 그리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다. <다음호에 계속>

드루 의료 선교사의 초가집

서종표 목사(군산중동교회)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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