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동성애대책과 차별금지법반대(23)]

기사승인 [528호] 2021.10.13  15:02:13

공유
default_news_ad2

- 동성애에 대한 회개를 위한 설교

소기천 교수(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학 교수,예수말씀연구소 소장)

Q 6:40 제자가 스승 위에 있지 않다. [제자가] 그의 스승과 같이 되면 [충분할 것이다].

바울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디도서 4장을 읽어 보라. 특히 3절에 명시된 것처럼,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어지러운 신학생의 모습이다. 신학생은 자기가 몸담은 신학교와 교단을 불신하고 저마다 일그러진 사회단체나 이념으로 무장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신학의 난맥상을 보인다. 이것이 오늘 신학교가 처한 현실이다.

예수님의 토라는 “제자가 충분해지면, 그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가 마태복음 10:25에 나오는 형용사 아르케토스 곧 ‘충분한’이란 단어인데,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제대로 된 스승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제자가 그 스승을 보고서 충분히 훈련이 될 수 있다. 우리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곧 신학교가 먼저 바로 서야 신학생이 훈련을 잘 받고, 그들이 공급되는 교회와 교단이 새로워진다는 순서이다. 더는 교수나 총장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서 교회에 핑계를 돌려서는 안 된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부족함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오늘의 신학적 위기는 신학교가 바로 서지 못해서 초래된 것을 인정하고, 더는 신학적 혼란이 가중되지 않도록 신학을 재정비하고 신학교육을 성경적 본질로 돌아가서 새롭게 세워야 한다. 이것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신학교의 인적 쇄신이 필수적이다.

그림입니다.

원본 그림의 이름: 20190219_144211.jpg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032pixel, 세로 3024pixel

사진 찍은 날짜: 2019년 02월 19일 오후 2:42

카메라 제조 업체 : samsung

카메라 모델 : SM-N950N

프로그램 이름 : N950NKSU4CRJ2

F-스톱 : 1.7

노출 시간 : 1/10초

IOS 감도 : 640

색 대표 : sRGB

노출 모드 : 자동

35mm 초점 거리 : 26

데란구유에 흔적만 남긴 채 사라진 신학교의 현장

바울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권면하기도 한다. 디도서 4장을 읽어 보라. 특히 3절에 명시된 것처럼,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있는 것이 오늘의 어지러운 신학생의 모습이다. 신학생은 자기가 몸담은 신학교와 교단을 불신하고 저마다 일그러진 사회단체나 이념으로 무장한 지도자를 맹목적으로 따르면서 신학의 난맥상을 보인다. 이것이 오늘 신학교가 처한 현실이다.

예수님의 토라는 “제자가 충분해지면, 그의 스승과 같이 될 것이라”고 적극적으로 권면한다. 여기에서 사용된 단어가 마태복음 10:25에 나오는 형용사 아르케토스 곧 ‘충분한’이란 단어인데, 중요한 전제가 하나 있다. 제대로 된 스승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제자가 그 스승을 보고서 충분히 훈련이 될 수 있다. 우리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라는 속담이 있듯이, 곧 신학교가 먼저 바로 서야 신학생이 훈련을 잘 받고, 그들이 공급되는 교회와 교단이 새로워진다는 순서이다. 더는 교수나 총장이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고서 교회에 핑계를 돌려서는 안 된다. 먼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부족함에 용서를 구해야 한다. 오늘의 신학적 위기는 신학교가 바로 서지 못해서 초래된 것을 인정하고, 더는 신학적 혼란이 가중되지 않도록 신학을 재정비하고 신학교육을 성경적 본질로 돌아가서 새롭게 세워야 한다. 이것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신학교의 인적 쇄신이 필수적이다.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신학교는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 신학교 교수들이 집단행동을 하면서 성명서를 남발하고, 특정 교회를 향해서 교단을 탈퇴하라고 지속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정치적 행동은 그야말로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는 꼴이다. 더구나 불교식 행진인 걷기도회란 명목으로 신학교에서 특정교회까지 데모를 하면서 소란을 피우니 시민들마저 눈살을 찌푸려서 반기독교정서를 부추긴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나자라 예수께서는 경고하시지만, 누구 하나 정신을 차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제자가 충분해지면”이라는 예수님의 토라는 사실상 누가복음 6:40의 “온전하게 된자”에서 헬라어 카타르티조라는 동사에서 변형된 과거분사 수동태인 카테르티스메노스를 통하여 ‘충분하게 준비된 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서 스승이든 제자이든 끊임없는 훈련을 거쳐야 제대로 훈련된 지도자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명심보감과 같은 선현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수양하였지만, 이제 자칭 기독교 지도자라고 여기는 이들은 본질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토라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제자도 시간이 지나면 스승의 자리에 서게 된다. 그러나 제자가 저절로 스승이 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스승이 되려면 훈련을 잘 받아야 한다. 제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 스승만도 못하게 될 것이다. 스승도 뼈를 깎는 훈련을 도외시하면, 스스로 눈먼 자로 전락할 것이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독자기고

item34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