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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조의 전킨선교사 연재(10)

기사승인 [526호] 2021.09.16  14: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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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멸 선교부 시대가 열리다

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 -1908년 1월 2일)

군산선교를 향한 열정, 군산교회를 향한 마음으로 인하여 전킨 선교사는 큰 휴식을 누리지 못하고 다시 군산으로 돌아왔다. 전킨에게는 또 감당 해야할 중요한 사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1898년 전주에서 개최된 제7회 남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군산선교부를 궁멀로 옮기기로 결정한다. 그 이유는 1899년 일본에 의해서 개항이 되는데, 군산 개항이 결정되기 전부터 정보를 듣고 몰려든 일본 사람들로 인하여 자신들의 선교부지를 빼앗길 것이 자명하였기에 외곽으로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군산선교부가 있던 수덕산 일대가 조계지역(개항지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으로 지정되자, 드루는 전도용 의료선 정박이 편리한 지금의 궁멀을 강력하게 추천하였다. 드루는 자신이 구입한 전도용 의료선으로 도서지역을 선교하였기에 궁멀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이다.

새로 선교부가 세워질 궁멀은 구암이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데이비스 선교사가 여성도들의 모임을 갖던 곳이며, 둘째 아들 시드니가 묻힌 곳이었다.

드루의 추천으로 군산선교부를 수덕산에서 궁멀의 구암 동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게 되고 선교부의 정책에 따라 궁멀에 건립된 자신의 집과 군선선교부 건립을 위해 전킨은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오고갔다. 이때 전킨이 타던 자전거는 군산 최초의 자전거이다. 전킨이 한국에 올 때 주문에서 구입했던 자전거를 군산에까지 가지고 오게 되고, 전도를 위한 용도로 사용하게 된다.

새로운 기대가 생기는 변화였지만 긴 장마와 당시 한국 인부들의 불성실로 인하여 선교부 건축 공사의 진행은 쉽지 않았다. 심지어 전킨이 옥구 현감에게 어려움을 토로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웠던 선교부 이전과 건축의 과정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2월 궁멀의 구암 언덕 위에 서양식으로 세워진 전킨의 주택과 군산선교부 건물이 건립되었다 옆으로는 드루 선교사와 군산에서 선교사역을 시작하게 디는 불 선교사의 집이 연이어 지어졌다. 마침내 수덕산 선교부의 시대가 끝나고 공식적으로 궁멀선교부와 궁멀교회(현 구암교회)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1899년 12월 21일 추운 겨울이지만 완공 기념으로 건축된 전킨의 넓은 거실에서 주일예배를 새롭게 드렸다. 물론 군산교회에 열심히 출석하던 교인들도 주님의 날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먼 거리였지만 기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했다.

이미 군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던 김봉래와 송영도는 다른 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였으며, 다른 교인들도 뒤질세라 주일이 되면 일찍이 교회에서 출석하여 장년반 성경공부에 참여했다.

전킨의 궁멀 새집의 거실을 예배당 삼아 함께 예배를 드리며 폭발적인 부흥이 일어났다. 그렇게 교인 수가 점점 늘어나게 되고 예배 장소가 비좁아지기 시작한다.

이에 군산교회 교인들은 새 예배당을 세우기로 결의한다. 지금까지는 전킨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전킨의 집이 아닌 예배당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다. 군산교회 교인들은 이때부터 자발적으로 건축헌금을 걷기 시작하는데 처음 그들이 계획했던 예산보다 다섯 배가 많은 헌금이 모여진다. 복음을 받아들인 후 그들은 신앙적으로 성장하였으며 성숙해갔다.

1899년 남장로교 선교부 기록에 의하면 ‘미국 교회는 군산에서 배워야 한다’라고 기록할 만큼 성도들의 열정이 대단하였다. 전킨의 열정이 군산교회의 성도들에게도 전염된 것이다. 그들에게도 거룩한 불길이 일어난 것이다.

또한 1899년 전킨을 비롯한 남장로교 선교사들은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신학교육을 위한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전주에서 사역하던 레이놀즈가 함께 신문물인 환등기로 교육하였는데, 이 교육은 전킨과 레이놀즈가 시작한 호남 교회 지도자에게 시작한 최초의 신학교육이었다. 평신도 사역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 양육을 위한 교육도 병행하게 된 것이다.

군산교회는 1896년 2명으로 시작한 세례자가 1897년 7명, 1898년 14명, 1899년 86명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전킨이 안식년을 취하는 1900년에는 53명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고, 그 해 110명의 세례교인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게다가 군산선교부 경내에는 만자산(대야 지경, 현 지경교회), 남차문(현 익산 남전교회), 송지동(김제 공덕면, 현지동교회), 통사동(개정 통사리, 현 통사동교회) 네 곳의 신앙공동체가 운영되게 된다. 군산선교의 지경이 넓어지게 된 것이다.

전킨의 복음 전도, 드루의 의료 사역에 궁멀에 군산선교부가 세워지는 일이 더하여져 폭발적인 군산선교가 확장되며 교회들이 세워지게 된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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