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장 한국교회와 교단 분열
한국성결교회 창립 제115주년을 맞이한 교단 역사를 기독교헤럴드가 새롭게 조명하여 전국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결복음에 대한 고귀함을 전하고자 안수훈 목사의 저서 ‘한국성결교회성장사’를 연재해 드립니다.
일본의 탄압정치에서는 하루빨리 해방되기를 한국 민족 전체가 오매불망 소원하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막상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전 국민은 누구나 기뻐서 하늘을 찌를 듯이 날뛰었지만, 기쁨도 잠시뿐이고 나라는 반 토막 되고 38선 이남과 이북으로 갈라져 민족 분열의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기독교도 자동으로 분열을 겪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국교회 분열은 장로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신사참배 문제가 일제 강점기에 큰 문제로 대두되었지만, 해방 후에는 신사참배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인사들이 자유의 몸으로 풀려나와 교회분열의 불씨가 된 것이다.
이들 중 한상동과 박윤선 목사 등이 경상남도에 ‘고려신학교’를 설립하고, 박형룡 목사를 교장으로 추대하여 취임시키게 된다. 그러나 신학 노선의 차이로 박형룡 목사가 ‘고려신학교’에서 물러나고 이 때문에 경남노회 안에서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된다.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모인 제36회 총회에서는 옥에서 출옥한 인사들이 ‘고려신학교’ 계통에 있는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했고, 고려신학교파는 “우리의 신앙이 옳다”고 ‘경남법통노회’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자, 이것이 장로교회 최초로 분열의 시작이었다.
또 한 번의 분열은 보수신학과 자유주의신학의 문제로 크게 의견 다툼이 벌어지고, 1938년 9월 3일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무기휴학을 선언하였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들어와 있는 모든 외국 선교사들을 한국에서 추방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러자 장로교회 교역자 양성기관인 신학교는 폐교 상태에 이르게 된다.
한편, 1940년 서울에서는 ‘조선신학교’가 개교되었으며, 황국의 기독교 지도자 양성 목적을 표방하면서 경기도지사로부터 인가되었다. 해방 이후인 1949년 장로교회 남부총회에서 직영신학교로 인가되었고, 이때부터 김재준 목사가 교수로 취임하고 나서 보수신학을 비난하고 캐나다 선교부를 제외한 주한 선교부와 ‘조선신학교 교수 전원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이때 신학생 51명이 김재준 교수의 강의가 자유주의라면서 강의를 받을 수 없다고 총회에 진정서를 제출하였고, 여기서 진보와 보수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1949년에 박형룡 목사를 다시 교장으로 모셔와 ‘장로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52년 제37회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고, 1954년 6월에는 ‘조선신학교’ 측이 새로운 신학을 찾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한국 기독교장로회를 창립하니 이때부터 한국 기독교장로회와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분열하게 된 것이다.
감리교회도 ‘재건총회’와 ‘부흥총회’로 분열되고, 6.25동란으로 중진 목사 40여 명이 납북된 1951년에는 부산으로 피난하던 중 총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 총회에서 유형기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고, 미국에서 무어(Moore) 선교사를 모셔왔으며, 1955년 3월 총회에 불만을 가진 일부 목사들이 천안에서 ‘호헌총회’를 개최하고 김응대 목사를 감독으로 추대하여 2개의 교파로 분열되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