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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원로목사 별세

기사승인 [526호] 2021.09.18  09: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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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7월 뇌출혈로 쓰러져 입원 치료, 14일 소천 · 18일 장례예배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음전도자’로 한국교회 부흥과 세계교회 성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 조용기 목사가 9월 14일 아침 7시 13분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조용기 목사가 소천한 이날 사단법인 한국교회총연합(대표회장 소강석·이 철·장종현 목사),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송태섭 목사),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임시대표회장 김현성 변호사) 등 교계연합기관들은 일제히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교회 측은 교계 지도자들과 정관계 인사, 성도들의 조문을 15일(수)부터 17일(금)까지 아침 7시부터 오후 10시, 베다니홀(대성전 1층)에서 받았다.    
고 조용기 목사의 조문소.

조용기 목사는 지난해 7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올 2월에는 부인 고 김성혜 전 한세대 총장이 세상을 떠남으로써 유족으로는 희준, 민제, 승제 세 아들이 남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담임목사는 15일 '조용기 목사님을 떠나보내며'란 제목의 메시지를 발표했다. 

이 목사는 메시지에서 "조용기 원로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거목이요, 세계교회의 위대한 복음전도자였다. 조용기 목사님은 6.25 전쟁의 폐허 속에서 희망을 잃고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신앙을 전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사람들이 안 된다, 어렵다, 힘들다고 부정적으로 말할 때 조용기 목사님께선 언제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설파하셨다"면서 "저에게는 더욱이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이셨던 조용기 목사님께서 이제 우리 곁을 떠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목사님을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끝내 믿음을 지키신 목사님께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의의 면류관이 주어지리라 믿습니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조의문을 보내 조용기 목사에 대한 깊은 추모와 애도를 표시했다.

 

청와대 강기정 정무수석은 조문소에서 교회 관계자들과 유족들을 위로했다.  

 
16일에는 성락성결교회 지형은 목사, 바울교회 신현모 목사,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 광림교회 김정석 목사, 순복음성시교회 명성훈 목사, 수영로교회 정필도 원로목사, 인천순복음교회 최용호 목사,  웨스트민스터대학원대학교 권문상 교수, 성산효대학원대학교 최용석 교수 등이 조문을 했다. 
 
17일에는 신촌성결교회 이정익 원로목사, 서울신학대학교 황덕형 총장, 안양대학교 고문변호사 황우여 전 교육부 장관, 남서울중앙교회 피종진 원로목사, 서울한영대학교 한영훈 총장, 성산효대학원대학교 곽종형 교수, 충무성결교회 진승호 장로, 세계로부천교회 최 선 목사 등이 조문을 마쳤다.

조문은 2만여 명이 했고, 제자교회와 미국 캐나다 등에 마련된 조문소, 인터넷 조문소 등을 포함하면 3만여 명이 조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예배(천국환송예배)는 18일 오전 8시 한국교회장으로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에서 드렸다. 예배 사회는 이장균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수석부목사), 기도는 장종현 목사(한교총 대표회장), 성경봉독은 이태근 목사(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장)가 했다. 바리톤 이승왕(여의도순복음교회 나사렛성가대)의 조가에 이어 김장환 목사(극동방송 이사장)가 요한복음 11장 25절부터 26절을 본문으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김 목사는 “목사님을 알게 된지 어언 50년이 넘었다. 서대문순복음교회를 담임하고 계실 때 청년부흥회를 인도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그때부터 지금까지 형제처럼 친구처럼 서로 기도해주고 마음을 나누며 한국교회와 세계선교를 위해 뛰어왔다”며 “조용기 목사님과 함께 영화 <명량>을 보면서 눈물 지으시던 모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차라리 꿈이라면 좋겠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빈자리가 너무 크고, 목사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게 들린다”고 눈물지었다.

이어 “사람들은 조용기 목사님을 세계 최대 교회, 한국교회의 큰 별, 사회사업의 대가로 기억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 목사님은 기도의 대장이었다. 그렇게 바쁜 생활 중에도 하루 5시간씩 기도하셨다. 기도를 통해 기적을 맛보셨고, 하나님을 경험하셨다”며 “조 목사님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 이영훈 목사님, 기도하고 또 기도하셔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예수님은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며 “삶을 마치는 날 천국에서 다시 만나뵙겠습니다. 조 목사님을 기억하는 우리 모두 오늘도 내일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조용기 목사님, 편히 가소서. 영원한 천국에서 부디 안식하소서”라고 설교를 마무리했다.

설교 후 소강석 목사(한교총 대표회장, 예장합동 직전 총회장)의 추모시, 이 철 감독(한교총 대표회장, 기감 감독회장)의 조사 낭독에 이어 이영훈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 위임목사)가 고 조용기 목사의 약력보고를 한 후 교계 관계자, 교회 당회, 성도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국민일보 조민제 회장이 인사하는 모습.

이어 국민일보 조민제(차남) 회장이 가족대표로 인사했다. 조 회장은 “아버지 조용기 목사님을 추모하신 모든 분들께 가족을 대표해 감사인사 드립니다. 아버지의 삶은 모든 것을 쏟아부어 선교의 열정을 불태운 삶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나태한 순간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동역자들과 함께였으며, 바쁜 선교의 일정과 심지어 차량으로 이동하는 시간에도 영어 단어를 외우시거나 기도를 하셨습니다. 진정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이 주신 선교의 삶을 잘 감당하시고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앞서거니 뒷서거니 다 본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사는 날 동안 하루하루를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시다. 그것이 아버지가 우리에게 원하는 삶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아버지의 천국 입성을 감사드리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업은 육적인 자식뿐 아니라 영적인 자식들도 함께 잘 계승하여 온 인류에 전파하는 사명을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사랑과 위로하심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들께 함께하시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라고 인사했다.

장례예배는 국민문화재단 이사장 박종화 원로목사(경동교회)의 축도로 마쳤다. 장례위원장은 한국교회총연합 대표회장 소강석, 이 철, 장종현 목사가 맡았다. 
 
하관예배는 이날 오전 10시 장지인 파주시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에서 드렸다. 
 

1958년 5월 18일 고 최자실 목사(1989년 11월 9일 소천)와 함께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천막 교회를 시작한 조용기 목사는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을 바탕으로 ‘희망의 신학’을 외쳤으며, 폭발적인 교회 성장으로 199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교인수 70만 명을 넘어서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조용기 목사는 1970년대부터 외국의 주요 언론들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 비결’을 소개했고, 사회적·신앙적·행정적·기술적 요인 등 다양한 성장 요인들의 중심에는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조용기 목사의 리더십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용기’라는 이름은 20세기 동안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이기도 했다.

조용기 목사는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한학과 전통적인 종교문화에 익숙한 가정에서 자랐다. 어수선한 해방정국이 이어지던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부친이 낙선한 뒤로는 가난한 사춘기를 보냈고 곧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다.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부산공고에 입학했으며, 학교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학교장과 미군 부대장 사이의 통역을 맡으면서 영어 실력을 키우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폐결핵으로 사망선고를 받고 병상에서 누나의 친구로부터 처음 복음을 접한 뒤 부산에서 미국의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Assemblies of God)’ 소속 켄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회심을 하고 폐결핵이 치유되는 신유의 경험을 하면서 신학교 입학을 결심했다.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장모이자 목회 동역자가 되는 최자실 목사와 만났다.

두 사람은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천막 교회를 개척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작이었다. 그 후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면서 조용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위상은 국내를 넘어 세계에 알려졌고, 1973년 9월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주최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아시아 국가가 주최한 첫 오순절 세계 대회였다. 여의도로 교회를 옮긴 뒤 성장세는 더욱 가팔라져서 1979년에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1976년에는 세계교회성장기구 곧 CGI(Church Growth International)를 설립해 세계 교회 성장의 발판을 만들었는데 당시 세계에서 성장하는 교회들의 대부분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용기 목사는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제3세계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이때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고 강력한 성령운동이 전개됐다. 구소련의 붕괴 후인 1992년 6월에는 모스크바에서 성회를 가졌고,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두 나라에서 모두 개신교 사상 최대의 집회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고, 비행여정을 보면 지구를 120바퀴 이동한 셈이었다. 조 목사는 국내에서 민족복음화운동에도 헌신하며 서울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성회를 인도했다.

특히 사회 구원을 위해 1988년에는 일간지 국민일보를 설립해 기독교의 목소리를 우리 사회에 전하기 시작했으며, 1999년에는 비정부기구(NGO)인 사단법인 선한사람들(현재 굿피플)을 세워 국내 및 해외에서 인권 환경 보건 및 아동복지 등의 증진에 앞장섰으며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또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2005년에 미국 뉴욕기독교교회협의회로부터 ‘더 패밀리 오브 맨 메달리온’을 수상하고, 2007년 미연방의회에서 ‘자랑스런 한국인 인증서’도 받았으며, 2009년에는 캄보디아 정부가 주는 훈장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는 저술가로서도 '나는 이렇게 기도한다', ‘4차원의 영적세계’ 등 다수의 저서도 남겼다.

기독교헤럴드 편집국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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