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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창문 칼럼: 한국전쟁 지평리 전투<61>

기사승인 [521호] 2021.07.09  12:0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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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1892-1964)장군을 기억하며”

경기지역에서 살기 좋은 곳 양평에는 한강이 흐르고 양지바른 곳이 많아 전원주택이 다른 지역보다 많이 입주해 있다. 그만큼 산하가 조화롭게 되어 있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으로 평가 받고 있다.

하지만 이곳은 71년 전 엄청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북한의 불법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면서 서울을 두 번이나 빼앗기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편 양평의 지평리 전투에서 승전한 유엔군은 즉각적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을 북쪽으로 밀어 넣는 한국전쟁의 주요 전환점이 되었다. 전쟁사에 지평리 전투의 중요한 점을 인식하고 그 전개 과정과 승리로 이끈 소중한 교훈을 찾고자 한다.

지평리 전투 주요 지휘관으로 활약하였으며 승리의 공적을 세운 랄프 몽클라르(Ralph Monclar, 1892-1964)장군을 살펴본다. 1892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그는 프랑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몽크라르는 제1차,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고 중장으로 진급하여 프랑스군의 핵심 장성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2월 16일까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지평리 일대에서 원형 방어진지를 구축한 미국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에 배속된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 제39군 3개 사단과 3일간 벌인 대격전이었다.

짧은 3일 동안 완전히 포위된 미군 23RCT와 프랑스 대대는 포위 3일째인 2월 16일에 미국 제1기병사단 제5기병연대 3대대를 주축으로 편성된 크롬베즈 특별 임무 부대에 의해 구출되었고 큰 피해를 입은 중공군이 철수하였다.

유엔군의 반격 작전에 공산측도 2월 11일에 공세로 화답했다. 수원, 이천, 원주, 강릉까지 진격해 있던 중공군은 유엔군이 울프하운드 작전과 썬더볼트 작전으로 한강을 회복하고, 다시 라운드업 작전을 개시하자 횡성군과 홍천군 사이 삼마치 고개 및 지평리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주둔하고 있던 유엔군을 몰아낸 다음 남한강에서 서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당시 삼마치 고개에 진출했던 국군과 미군은 중공군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후퇴했고, 2월초 미9군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지평리에 진주한 미군 23연대 전투단의 방어 진지는 견부진지(肩部陣地)로 남게 되었다. 지평리에 남게 된 23연대 전투단(23RCT)은 라운드업 작전을 위해 편성된 전투단이자 중공군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 역할을 자처했다.

중공군은 지평리에 39군 예하 3개 사단을 투입했다. 좌우 인접 부대가 모두 철수하는 바람에 고립 상태가 된 23연대전투단의 철수를 미10군단이 8군 사령부에 요청했으나, 오히려 8군 사령관은 진지 사수를 명령했다.

1951년 2월 14일 저녁 7시, 중공군은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다시 일제 공격을 시작했다. 중공군 1개 연대 병력이 방어선을 돌파해 진지 내에서 백병전이 벌어졌으나, 미군과 프랑스군은 끝내 진지를 사수했고 중공군은 새벽녘에 다시 철수했다. 이 무렵 후방에서는 미1기병사단 5기병연대(연대장 마셜 G. 크롬베즈 대령, Marcel G. Crombez)를 주축으로 한 크롬베즈 특임대(Task Force Crombez)가 편성되었다.

2월 15일 아침, 크롬베즈 대령은 1대대는 도로 우측 산지, 2대대는 도로 좌측 산지를 장악하도록 지시해 두 대대는 중공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저항은 매우 거셌고, 2개 포병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한편 미국의 정찰기는 교전 중인 두 대대의 북쪽에 중공군 대부대가 있다고 보고했다.

전투는 오전 내내 계속되었고, 크롬베즈 대령은 지금 간다면 기갑 병력만이 적의 점령지역을 관통해 지평리에 도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부상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전투를 지휘한 폴 프리먼 대령을 대신하여 연대는 2대대장 에드워드 중령이 지휘하고 있었다. 크롬베즈 대령은 연대에 배속된 전차 23대를 진격대열에서 분리하고 L중대 165명과 공병 일부를 전차에 탑승시켜 지평리로 곧장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이 작전에 앞서 크롬베즈 대령은 헬리콥터로 진격로를 직접 점검했다. 원래 계획은 앰불런스 및 보급품을 실은 트럭들이 함께 진격하는 것이었으나 크롬베즈 대령은 도로 사정상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결국 보병을 위에 태운 전차부대만 우선 진격하고, 구급차와 보급트럭은 도로사정이 괜찮아지면 그때 불러들이기로 했다. 일단 M46 패튼으로 구성된 6전차대대 D중대가 선두에서 진격하고, M4A3으로 이루어진 70전차대대 A중대가 그 뒤를 따랐다.

오후 3시가 되자 공격대는 공격준비를 서둘렀다. 전투공병 4명이 2번째 전차에 올랐으며, 160명의 L중대원들도 15대의 전차에 분산 탑승했다. 15시 45분, 차간거리 13m(15야드)를 유지한 채 전차들이 기동을 시작하자 좁은 2차선 도로 양측면에서 중공군의 사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전차의 장갑과 항공지원을 믿고 크롬베즈 특임대는 단호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오후 5시, 결국 크롬베즈 특임대는 공격 개시 단 1시간 15분만에 6마일의 거리를 뚫고 지평리에 도달하는데 성공했다. 격렬한 화망사격에 직면할 때마다 전차는 멈춰 서서 대응했고 적탄에 고스란히 노출된 보병들은 뛰어내려 엄폐물을 찾았다. 문제는 보전협동이 원활하지 않아 L중대는 절반에 가까운 70명의 병력을 상실했으며, 그 외에도 몇몇은 이건 미친 짓이야라며 남쪽 본대로 되돌아가거나 낙오돼 포로로 잡히는 등 최종적으로 전차와 함께 지평리에 도달한 L중대원은 23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TF 크롬베즈는 기갑부대 특유의 강력한 화력과 신속한 공격으로 500명이 넘는 추정 사살 전과를 올리며 중공군의 후방까지 북진해 이들을 심각하게 위협했고, 덕분에 중공군들이 물러난 틈을 타 지평리 방어선을 인접 전선들과 연결시켰다

몽클라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총탄이 완전 바닥나자 총검술로 중공군과 맞섰다. 결국 중공군은 프랑스군에 패퇴했고, 지평리 전투에서 승기를 잡은 유엔군은 다시 북진을 재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후퇴로 밀리는 상황에서 지평리 전투에서 뚫리면 국군은 다시 남쪽으로 밀리는 위급한 상황에서 프랑스 대대의 성공적인 방어로 말미암아 북괴군의 남하를 막고 다시 북진하게 되는 전기를 마련한 매우 중요한 전투였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한국전쟁에 참전해 경기도 양평의 지평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양평의 지평리 전투는 6.25 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전투였다. 인천상륙작전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간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하게 한 전투였다면, 이에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것을 막은 전투가 지평리 전투였기 때문이다.

당시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전선을 밀어내며 파죽지세로 남진하고 있었고 지평리까지 무너지면 전쟁이 패배로 기울어지게 되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는데 이때 몽클라르 장군이 이끈 프랑스 대대가 중공군을 강타하여 그 세력을 꺾어버린 전투가 지평리 전투였던 것이다.

프랑스 대대의 승리 요인은 몽클레르 장군의 위대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장군에서 중령으로 4계급 스스로 강등하고 참전할 정도로 자유의 투사였다. 또한 전원 자원 병력으로 구성하였고 그들은 2차 세계대전 전투 경험자이었다. 중공군의 피리 소리에 맞추어 더 큰 사이렌을 울림으로써 적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 백병전을 잘함으로써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지평리 전투는 미국 1기병사단 미국 5기병연대(연대장 마르셀 G. 크롬베즈 대령, Marcel G. Crombez)를 주축으로 한 구조대(크롬베즈 특임대)가 투입이 되어 종식이 되었다. 성공의 외부요인은 주간에 포병 및 항공의 막강한 화력 지원 받았다. 결정요인은 미국 기갑연대의 구출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나라사랑은 365일 해야 한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며 대가가 있었음을 인식해야한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속되기까지 희생하신 애국지사들의 헌신을 잊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특별히 감사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작금의 자유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소중한 생명을 조국에 바친 국군장병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자신의 존재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던진 고귀한 희생의 대가로 주어진 대한민국은 후손들이 이어 가야만 하는 책임이 크다는 점을 잊지 말고 애국의 삶을 실천하자.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상담복지대학 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최 선(Ph.D., Th.D.) smse21@hanmail.net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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