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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대담> 세계적인 웨슬리 운동가 양기성 박사를 찾아서 ①

기사승인 [519호] 2021.06.10  14:5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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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슬리 운동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뜻은?”

"성령 받고 목회자 · 학자가 되기까지를 말한다"

 

양기성 박사.

한국에서 뿐만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웨슬리의 성령신학과 성결복음(이웃사랑)이 성결교회, 감리교회, 나사렛교회, 구세군교회, 순복음교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며 컨트롤타워이다. 웨슬리를 연구한 학자들이 많이 있지만, 현장목회와 신학이론을 겸비한 학자는 많지 않다. 

이번 대담에는 어린 시절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한 친구의 전도를 통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나, 불타는 성령체험을 경험한 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목회자, 행정학자, 기도원장, 성령부흥사, 아동복지 사회사업가, 저술가, 교육가, 조직행정가로 세계 최초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를 창립했고 서울신학대학교 웨슬리연구소를 설립하여 세계 6대 도시에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를 설립하고 47년간 웨슬리를 가슴에 품고 20여 년 가까이 웨슬리언교회지도자협의회 사무총장으로 활동하는 양기성 박사를 만나 세계 웨슬리 운동가가 되기까지의 자초지종을 경청했다.

본 기자는 지난 6월 7일 서울 강남의 모 사무실에서 양기성 박사(청주신학교 교장)와 기독교헤럴드 하문수 사장이 대담할 수 있도록 주선하고, 웨슬리언 학자로서 세계적인 활동을 하게 된 동기와 배경에 대해 듣게 되었다. 이날 하 사장은 질문에서 양 박사의 성장과정 뿐만 아니라 청소년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면면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헤럴드>

하문수 사장(오른쪽)와 양기성 박사의 대담.

Q. 양기성 박사는 한 지역교회의 목회자이면서 ‘세계 웨슬리 운동가’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신학을 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A. 나는 1970년에 친구를 따라 유성성결교회의 학생회(고등부)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당시는 교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보다 남녀 학생들이 예배 후 2부 시간에 간식을 나눠 먹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교회에서 설교는 지루하지만, 핵심은 착하게 살아가라는 정도로 알게 됐다. 그리고 나는 원래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않더라도 착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왜 교회에 출석해야 할까? 늘 궁금했다. 나는 이 문제를 나에게 질문해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나는 청소년기에 음악과 영어를 좋아했다. ‘성인이 되면 성악가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부흥성회가 열리고 부흥강사의 설교를 듣던 중 “여러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십니다!”고 외치는데 그 말씀에 내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를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밤마다 유성성결교회 예배당을 찾아가 문을 잠그고, 무서워서 몽둥이를 옆에 가지고 약 두 달 동안 기도했다. 나는 “하나님! 계시면 제게 보여주세요. 안 보여주시면 교회 안 나올 거에요. 저는 영어를 열심히 배워서 세계적인 외교관이 되고 싶습니다. 저에게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신다면 죽도록 헌신하고 충성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1970년 5월 24일 이날도 기도 중 깊은 밤중에 내가 더욱 간절히 뜨겁게 부르짖으며 “하나님! 계시면 저에게 나타나 보여주세요. 교회 다니는 시간이 아까워요.” 밤새워 부르짖으며 기도했는데 새벽 2시쯤 되자 갑자기 ‘혀’가 말리고 돌아가면서 ‘방언’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온몸이 불같이 뜨거워지더니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방언으로 기도하다 보니 땀으로 옷을 흠뻑 적시고 하늘을 나는 영혼의 기쁨과 희열을 맛보게 되었다. 내 입에서는 찬송이 저절로 나왔고 그 순간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사라졌고, 작열하는 태양과 같은 빛이 내 몸을 휘감아 버렸다. 기도는 새벽까지 지속되었고, 계속해서 방언으로 기도와 찬송을 번갈아 하면서 불렀다. 이때의 찬양은 다윗 왕의 마음과 같은 찬양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제 생각해보니 1738년 5월 24일 수요일 밤 8시 45분경 영국 올더스 케일에서 존 웨슬리 목사에게 성령충만을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240여 년이 지난 1970년 5월 24일 같은 날 내게도 불같은 성령충만을 주신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즉시 형님께 신학교에 입학하겠다고 말했더니, 형님은 내게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외교관이 되어야지 무슨 신학교란 말인가?”라고 타이르고 설득했다.

육군 장교 출신으로 학구파이신 형님은 아버지와 같았고 엄한 훈련자로 내가 신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졸업 후 유성천양원이라는 아동복지시설에 취직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낮에는 행정업무와 아동 상담을 하면서 밤에는 아동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일을 6개월 정도 하고 있을 때 대전에 사는 누나 소개로 남대전성결교회의 성도 가정에서 가정교사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는 남대전성결교회에 출석했다. 그때 나에게 가정교사 댁의 사장님이 만약에 충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면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남대전교회 집사님 가정교사를 하면서 문창초등학교, 충남중학교, 대성실업고등학교 학생까지 영어, 수학 과외 수업으로 생활했다. 

나는 성실하게 학생들을 가르쳤다. 어느덧 갈급한 소명으로 갈망하던 1974년 3월 서울 서대문 충정로 소재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조종남 학장으로부터 웨슬리신학 강의를 들었다. 

그때 나는 “세계는 나의 교구다!”라며 옥스퍼드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최고의 지성적 엘리트가 교수직을 버리고 국교도의 목사직보다 노방전도자, 야외설교자, 사회사업가, 저술가, 교육가, 조직행정가로서 예수를 그대로 본받은 바울을 본받은 88세로 소천하기까지 소외된 자, 억눌린 약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위대한 성직자 존 웨슬리가 너무 멋져 크게 감동받았다.

나도 웨슬리를 본받는 지도자가 되어야겠다고 굳게 결심한 뒤 지금까지 47년을 한결같이 경주하게 하신 주님의 선행적인 은총은 특별한 하나님의 은총이 아닐 수 없다.

Q. 존 웨슬리 생애와 신학을 배우고 전하며 가르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A. 내가 목사가 된 것은 성령님의 역사이지만 웨슬리 운동가가 된 것은 무엇보다 웨슬리의 위대한 신앙적인 삶의 영향이었다. 존 웨슬리는 옥스퍼드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다.

                                                                                           <다음호에 계속>

기독교헤럴드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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