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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72)

기사승인 [515호] 2021.04.28  14:2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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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 스토리

위 영

(본지논설위원'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천 원을 주고 무씨앗을 샀다. 표지에 적힌 대로 우선 물을 준 씨앗을 캄캄하게 덮어놓았다. 며칠 불렸는데 어둠 속에서 무씨앗은 아주 작은 순을 냈다. 순이 아니라 몸을 여는 것이었을까? 아마 그 며칠이라는 시간이 씨앗에게는 엄마 뱃속이었을 것이다. 자라나기 위한 도움닫기였을 테고, 화장지를 깔아도 된다고 했는데 그래도 거즈 천이 좋을 것 같아 그 위에 알맞게 씨앗을 배열했다. 거리 두기 같은 것, 사람뿐 아니라 식물에도 자기만의 오롯한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극지방 가까이 노르웨이령인 스발라르 섬이 있다. 구글어스로 얼핏 보기에는 노르웨이보다는 그린란드 쪽이 더 가까운 듯싶다. 눈 나라 하얀 섬이다. 극지라 태양이 머리 위로 오지 않는다고 한다. 태양이 스쳐 지나가는 곳, 그래서 어느 때는 아침이 오지 않는 극야, 어느 때는 백야, 낮이 계속되는 나라다. 영구 동토층으로 뒤덮인 땅, 그곳에 <국제 종자 저장고>가 있다. 바위를 파내 만든 130m의 긴 터널 끝에 5억 개가 넘는 종자가 보관되어 있다. 우리나라 재래종 작물 1만3185종도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 씨앗이 발아하는 것을 막기 위해 영하 18도가 유지되고, 만약 전기 공급이 끊겨도 자연 냉동이 되며 무너지지 않는 내진 설계로 되어있다고 한다. 저장소는 금고를 관리할 뿐, 씨앗의 주인은 맡긴 국가나 연구소다. 저장소도 맘대로 상자를 열어볼 수 없으며 당연히 유전자변형(GM) 종자는 들어올 수 없다.

미국에서 재배된 콩 종류는 578종이었는데 현재 재배되는 종은 32종으로 94% 종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FAO에 따르면 20세기에만 세계 작물 종의 75%가 사라졌다고, 우리 먹거리의 4분의 3은 식물 12종, 동물 5종에서 나온다. 세상에, 겨우? 종의 다양성은 식물의 기초이며 기둥인데 고수익이 되는 새로운 육종 작물만을 심게 되면서 식물군의 다양성은 사멸되고 식물 고유의 형질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가령 그 소실된 형질은 예기치 못한 자연의 상태에 해당 작물을 보호해줄 형질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세계의 끝 씨앗 창고’라는 책을 쓴 캐리 파울러는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이 불확실한 미래에 가장 확실하게 대처하는 방법이라고 강조한다. 카카오나, 코코넛, 바나나 같은 작물은 씨앗이 아니라 ‘영양번식’으로 자라서 재배하지 않으면 바로 사라져버리는 품종도 있긴하지만,

캐리 파울러의 책에는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스발라르섬의 두 남자 이야기가 있다. 1922년 2월 두 남자가 총 한 자루와 6주 치의 식량을 챙겨 북쪽으로 갔다. 덫사냥꾼 노인의 안부가 여러 달 끊겼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 앞으로 얼음 조각들이 나타났다. 취빙을 피해 배를 조종할 수도 배에서 내려 얼음을 딛고 해안으로 갈 수도 없었다. 마침내 낯선 곳에 닿았고 조그만 오두막을 발견했다. 봄까지 그들은 버틸 거라며 일기를 적어갔다. 그들의 유해는 이듬해 여름에 발견되었다. “우리의 유해를 발견하거든 고향의 흙에 묻히기 전 잠시 교회에 들르게 해달라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다. 하얀 관이나 하얀 비석은 사양한다. 너무 오랫동안 흰색만 봐와서 다른 색을 보고 싶다. 무덤에 꽃을 심어주기를, 파란색과 빨간색으로…….”사랑을 실천하던 그들은 굶어 죽었다. 지극히 아름다운 죽음이어서 현대판 노아의 방주가 들어선 것일까. 먹을 것이 없으면 인류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 농업의 역사는 사실 인류 문명의 역사이다. 기이하게도 가난한 나라 인도에서 오히려 여러 작물을 함께 심어 야생의 힘을 복원시키는 농법을 하고 있다고 한다. 네팔은 씨앗 보존을 잘하는 모범국가로 작물박람회를 열어 다양한 경작을 하는 농부들에게 인센티브를 준다고 하니 자본주의에 깊게 물들지 않은 순수함 때문일까 생각해보았다.

무순은 생각보다 잘 자라났다. 날마다 눈에 보이게 달라졌다. 아침마다 무순에 물 뿌리기가 일과의 시작이었다.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를 무순에서 체감했다. 그리고 드디어 추수했다. 샐러드 위에 무순을 살짝 놓으니 금상첨화가 되었다. 무 냄새가 제대로 났다. 약간 알싸하고 직선적인 내음. 이거 엄마가 농사한 거야,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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